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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Nov 12. 2022

잠시 쉬었다가도 괜찮은 거 맞아?

인생 계획이 망가져 버렸을때

"준이가 재수 안 하고 대학 들어가서,

한 달도 안 쉬고 군에 입대해 제대하고

졸업한 뒤 취업해서 첫 월급 타고

용돈 주면 70이야”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 성동일 씨가 아들을 두고 말한 웃픈 현실에 패널들이 폭소한 적이 있다.


성동일 배우의 자녀처럼 쉬지 않고 달려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 나는 마치 테트리스처럼 내 인생의 계획표를 딱딱 맞게 짜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즐거웠다.


언제나 늙어 죽을 때까지의 미래를 넓게나마 그렸고, 상황이 바뀌면 바뀌는 것까지 포함해서 다시 스토리를 짰다. 아마 나에겐 그것이 얄팍한 안정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거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해서 학자금 다 갚고, 얼마 이상 모아서 30살 되기 전에 결혼하고, 2~3년간 신혼을 즐기다 아이 갖고 복직해서, 40대쯤에 퇴사해서 다른 일에 도전하고, 60대쯤 전원주택 짓고 남편이랑 오순도순 살아야지.'


결혼할 때까지는 계획표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29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난치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29년간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것도, 난치병으로 투병할 때 가장 나를 좌절시켰던 것도 바로 이 인생계획이었다. 평범한 일상은 아득히 멀어져 버렸고, 당장 1년 후도 그려지지 않았다.


내 또래들이 한창 자신의 길을 찾으며 달려갈 시기에, 나는 멈춰있었다. 나를 설명할 어떤 타이틀도 없다는 건, 꼭 쓸모없어진 기분이었다.


아마 나의 지인이 이런 상황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이야기했겠지. "사람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잖아.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언제나 남 얘기는 쉽다.


잊을만하면 내 앞에 찢어진 인생계획표가 나를 다시 밑으로 잡아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은 좀 망한 것 같았다.





또다시 이런 생각이 나를 잡아먹으려 했던 날, 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속상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도 어릴 때 3년간 결핵을 크게 앓아서 배에 복수 차고 다들 죽는다고 했었어. 그래서 학교도 월반했잖아. 그렇지만 지금 봐. 멀쩡하게 직장 들어가서 잘 살지?


"TV에 나온 어떤 의사가, 자기는 의대에 다니면서도 자기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졸업하는데 8년이 걸렸대. 쉬었다, 다시 했다, 쉬었다, 다시 다녔다 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잘 근무하고 있대."


넌 이제껏 너무 열심히만 달렸어.
한 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마.
힘이 빠지면 조금 멈춰서 쉬었다가 또 가면 돼.
쉬엄쉬엄 가더라도 끝까지만 가면 되는 거야."
 


그 순간, 하아- 하고 긴장이 풀어지는 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어쩌면 아프기 전부터 이 말을 기다렸던 걸까.


다른 어떤 위로보다, 실제로 비슷한 아픔을 겪어내고 삶으로 증명해 보인 엄마의 말이 내 마음속에 힘 있게 박혔다.


엄마의 말은 잘못된 완벽주의로 인해 조금만 목표한 과정에서 벗어나거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망했다고 생각하는 '빨리빨리 성미'도 고쳐놨다. 조금 늦어도, 목표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왔어도 '여기서부터 다시 하자. 모든 것이 과정이야.'라고 나의 걸음마를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앞만 보고 가느라,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모습의 삶을 놓칠 때가 많다. 나도 그랬다. 좁은 내 시야에서 보니 그 틀에서 벗어난 내 인생이 망한 것 같다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잠시 쉬어 주위를 둘러보면, 각양각색의 인생이 각자의 방식으로 굴러가고 뛰어가고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끔 다시 불안해질 때면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이 조금 일그러져 버렸을 순 있어. 그렇지만 망한 건 아니야. 여기서부터 또다시 만들어갈 수 있어. 다시 소망해보자."


“잠시 쉬었다가도 진짜 괜찮은 거 맞아?”라는 물음에,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반드시 내 삶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다. 갑자기 삶이 멈춰버렸어도, 다시 일어나서 가던 길을 다시 가면 된다고. 원래 인생이 그런 거라고. 별일 아니라고.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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