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던 그 날의 밀크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주저앉을 용기가 필요한 그 날의.

by 고민베어 이소연


밀크티 하면 영국의 우아한 밀크티가 쉽게 떠오르지만, 나에게 밀크티란 인도에서 서늘한 산바람 맞으며 홀짝이던 달달한 짜이(Chai)다. 십여 년 전 무작정 배낭 하나 들고 덜컥 간 인도. 예상치 못한 더위에 모든 의지가 바닥났고, 인도에서 가장 온도가 낮다는 홍차의 산지인 다즐링으로 탈탈거리는 승합차에 끼어 앉아 올라갔다.


40일 여행에 20일 이상을 다즐링에 죽치고 있었다. 뭘 보자고 간 여행이 아니라 탈탈 털린 20대의 나를 토닥거리고자 간 여행이었으니 마냥 먹고 자고 길거리에 앉아있었다. 그중에 가장 많이 한 일이 짜이를 마신 일. 기차에서도 짜이, 음식점에서도 짜이, 안개 가득한 산에 산책을 가도 짜이, 북적이는 관광지에 가도 늘 짜이 노점상들이 있었다. 짜이상들은 길바닥에서 20년은 족히 더 되어 보이는 시커먼 냄비에 우유와 설탕, 홍차를 잔뜩 붓고 휘휘 저어 달고 진한 차를 끓인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먹지 않을 비주얼이지만 얼마나 열심히 이리저리 뛰면서 만드는지 한 잔 사주고 싶어 진다.



인생 탈탈 털린 시절, 스물아홉의 나와 짜이


십 년간 목표를 향해 달리다 모든 목표를 잃었던 순간, 나는 인도에 있었고 짜이를 마셨다. 목표 없이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사는 인도인들을 마주 보며 나도 하릴없이 마냥 시간을 보냈다. 인생에서 가장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장 긴 시간이었다. 정말 뭐라도 하고 싶어 질 때까지, 질릴 때까지,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미친 듯 달리며 살 마음이 들 때까지 멍하니 길바닥에 앉아 짜이를 홀짝였다. 그 맛이 뭐라고, 인도에서 싸구려 차를 잔뜩 사다 한국에 돌아와서 짜이를 끓여봤는데 절대 그 맛이 나질 않더라. 그 시절의 나와, 그곳의 분위기가 만들어 낸 맛이겠지.


시간이 흘러 어쩌다 카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영국의 연하고 부드러운 밀크티가 아닌 달고 진한 우유 홍차가 유행을 타고 있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고급스럽고 풍부한 맛의 밀크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향기를 불러일으키는, 달고 진한.





<로 얄 밀 크 티>

밀크티 베이스 만들기 (약 4잔 분량)

이 레시피는 밀크티 베이스를 직접 만들어 보관기간을 늘리고, 맛은 가장 풍부하게 나도록 고안한 방법이다. 설탕을 연유 비율만큼 넣어 보관을 용이하게 하고 홍차는 우유에 냉침하는 방식으로 떫은맛없이 깔끔하게 만드는 밀크티 베이스. 먹기 전 바로 우유와 혼합해 음료를 완성한다. 여기서 사용한 헤로게이트 요크셔 골드는 가장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 나며, 다른 향을 원한다면 다양한 홍차로도 시도해보자.

재료 : 우유 150ml / 350ml, 원당 (비정제 설탕) 120g, 헤로게이트 요크셔 골드 잎차 42g

1. 냄비에 우유 150ml와 원당 120g을 넣고 데운다. 가장자리가 끓어오르면 바로 불을 끄고 원당이 녹도록 충분히 저어준다. 원당을 녹이기 위한 과정이므로 너무 끓이지 않도록 한다. 따뜻한 정도로 유지하며 원당이 녹을 때까지 부지런히 젓는다. 펄펄 끓여 졸아들면 냉침 시 원당이 다시 결정화될 수 있다. 원당이 녹으면 50도 정도로 식힌다.

2. 보관할 밀폐 용기에 찬 우유 350ml와 홍차잎 42g을 넣어 섞는다. 50도로 식힌 1번과 2번을 한데 섞어 잘 저어 준 후 밀폐해 냉장실에서 만 하루 냉침한다. 가끔 냉장고에서 꺼내 젓거나 흔들어준다.

TIP! 처음 작업해보는 직원에게 지시했더니 '1번 2번을 한 번에 하면 되잖아?!' 하며 모든 재료를 냄비에 통째 넣고 끓여버렸다. 어떻게 되었을까? 온도가 높은 상태에서는 많은 양의 마른 홍차가 불면서 우유를 머금어버린다. 우유가 졸아 사용할 베이스가 반으로 줄어드니 비율이 달라져 맛도 달라진다. 천천히 우려내는 냉침 단계를 거치지 못하므로 떫고 텁텁한 맛도 난다. 반드시 레시피대로 순서를 지켜 작업해야 한다.

3. 만 하루가 지난 베이스는 고운 체나 거름 보자기에 걸러둔다. 보관은 2-3일 정도까지 가능하다.

TIP! 거르기 귀찮은데 처음부터 거름망에 홍차를 담아 냉침하면 어떨까? 선택의 문제이지만 거름망에 홍차를 넣어 냉침하면 맛이 덜 우러난다.



밀크티 만들기

재료 : 아이스 밀크티 (밀크티 베이스 150g, 우유 110g)

핫 밀크티 (밀크티 베이스 140g, 우유 90g)

아이스 밀크티 : 잔에 밀크티 베이스 150g를 담고 얼음을 가득 채운 뒤 우유 110g을 부어 완성한다.

핫 밀크티 : 피쳐에 밀크티 베이스 140g, 우유 90g를 담아 스팀 하거나 데우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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