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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파이 Jul 02. 2022

끝장을 봐야 하는 ‘쑥빵’

제주도에서 올라온 택배를 받고 있자면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은 조선시대 임금님이 된 기분이다. 요즈음 진상된 공물은 ‘쑥빵’이다. 돈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임금님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택배 상자를 열 때부터 며칠간 상상해 온 진한 쑥향이 올라온다. 얼른 하나 데워 먹어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지만 침착하게 위생 봉투를 꺼내 소분에 나섰다. 제주도 쑥빵은 거리가 먼 만큼 한 두 개 먹고 싶은 만큼 주문을 받아주지 않는다. 주문하려는 가게마다 최소 주문 가능 수량이 60개여서 결정하기까지 오랜 고민이 있었다. 너무 먹고 싶었던 음식도 여러 개를 사들였다가 질려서 후회한 경험이 적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어느덧 세 번째 가게에서 주문한 쑥빵을 먹고 있는 중이니 쑥빵에서 만큼은 고민이 무색해진다. 쑥빵이라고 표현했지만 조금씩 다른 빵들이라 쉽사리 질리지 않기도 했을 것이고, 이렇게 해서도 먹어보고 저렇게 해서도 먹어보면서 그만 먹고 싶을 때까지 끝장을 보겠다는 자세로 임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봄이 다 지나갈 무렵, 갑작스레 쑥 내음이 끌렸다. 하지만 국물 내어 먹고 싶은 것은 아니고, 떡을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밀도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것을 베어 물며 쑥향을 삼키고 싶었다. COVID-19 발발 이전 제주도에서 찾아갔던 쑥빵 가게가 떠올랐다. 쑥빵 택배 행렬의 막이 올랐다.


물 건너 도착한 진한 쑥 색깔의 빵 안에는 당도도 양도 적당한 팥이 들었다. 냄비에 물을 붓고 찜기에 푹푹 쪄서 꺼낸 쑥찐빵의 맛은 달콤 쌉싸름했다. 커피를 내려 아침마다, 간식으로 먹다 보니 십 수 개는 금방이고, 놀러 온 가족들에게 소분한 봉지를 몇 번 쥐어주다 보니 수 십 개가 냉동고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팥이 든 전형적인 쑥찐빵도 좋았지만 쑥 맛에 집중한 앙금 없는 쑥빵이 이번 택배의 승자였다. 입과 코로 쑥을 한껏 느끼며 한 입 가득 넣어 먹어도 좋고, 이런저런 응용 레시피를 써먹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간단히 해 본 것은 우유와 함께 먹기. 우유와 쑥빵을 함께 먹으면 쑥 라떼와 같은 맛이 난다길래 오랜만에 우유를 주문했다. 과연 쑥 라떼를 씹어먹는 것과 같은 맛이었다.


쑥빵을 모닝빵 삼아 두 가지 샌드위치도 만들어 보았다. 뜨거워서 자꾸 떨어뜨리는 쑥빵을 겨우 반으로 갈라 샌드위치 햄을 넣고, 슬라이스 브리 치즈도 한 장 넣어 만든 샌드위치는 쑥향과 짭짤한 맛의 조화가 괜찮았다.

엄마가 만들어 준 감자 샐러드를 듬뿍 넣은 샌드위치도 이틀 내리 먹었다. 햄과 오이, 당근을 넣은 포슬포슬한 홍감자 샐러드를 쑥빵에 쏟아져 내리기 직전까지 바르면 두 개만 먹어도 배가 불러왔다.


따끈하게 데운 쑥빵 사이에 아이스크림을 한 덩이 떠 넣어 먹어 보기도 했다. 쑥의 맛과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맛이 굉장히 잘 어울렸지만 아이스크림이 조금씩 녹아 상상했던 것과는 약간 달랐다. 혹시 카페 같은 곳에서 팔아야 하면 이 점을 보완해야겠다며 알지도 못하는 사장님을 걱정했다.


은은한 쑥색의 쑥식빵도 별미였다. 전자레인지에 간단히 돌려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먹어도 충분히 맛있고, 쫄깃쫄깃한 쑥찐빵을 쑥식빵으로 싸서 함께 먹으면 쑥향을 배로 느낄 수 있다. 매일 눈도장을 찍는 온라인 빵 카페에서 추천받은 방법이다.


쑥빵이 다 떨어져 갈 때 즈음에도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자꾸 생각나 당황스러웠다. 쑥빵 사이에 슬라이스한 바나나를 넣고 오븐에서 고온으로 구워 내면 어떨까, 크림치즈를 발라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프라이팬에 놓고 납작하게 눌러 팬케이크처럼 만든 뒤 메이플 시럽을 부어 먹으면 어떨까. 쑥찐빵에 버터 한 덩이 끼워 넣고 앙버터 쑥빵을 만들어 먹어 봐야 하는데.


예전 같았으면 소위 ‘음식에 꽂힌’ 나를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먹을 것보다는 좀 더 고상한 대상에 집중하는 사람이길 바랐다. 음악이라던지, 어학 공부라던지, 그림이라던지. 하지만 힘들었던 한 주를 마치고 여유롭게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경험이 반복되며 어느덧 ‘그게 왜 나빠?’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요리가 예술의 한 범주를 차지하고, 먹방이 큰 인기를 끄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듯하다.


덕분에 쑥빵을 향한 갑작스러운 열정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냉동실에 쑥빵 6개가 남았는데 아직도 질리지 않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한 번 더 제주도에 전화를 걸어 조선시대의 임금님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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