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시크의 대명사 에디 슬리먼
Hedi Slimane
“마른 몸은 옷을 입기에 훨씬 낫다. 큰 체형, 다시 말해 몸집이 큰 것은 옷을 벗었을 때가 더 낫다. 물론 개인적인 선호도와 취향의 차이지만 남자들에게도 다이어트는 필요하다.”
에디 슬리먼, 우리가 생로랑의 디자이너로 많이 기억하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디자이너가 되기 전 에디 슬리먼
그는 1968년 7월 5일 파리에서 튀니지안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살부터 사진 찍기에 관심이 많았으며 흑백 자화상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가 의상실을 했었던 것에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옷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었다.
16살이 되던 해에 그는 패션 커리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옷을 만들 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언론학에 관심이 있어 Le monde (프랑스의 신문사)를 매일 방문하여 기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18세가 되던 해 판테온 아 사스 대학(파리의 그랑제꼴)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법학 학위를 취득하려 했으나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중퇴를 결정했다. 그는 마침내 에꼴 뒤 루브르 에 입학 후 사진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모델을 찾기 시작하였고 거리 캐스팅을 하며 학업을 진행했었다.
# 패션, 그의 시작
1992년부터 1995년 에디 슬리먼은 루이비통의 10주년 모노그램 프로젝트를 장 쟈크 피캬(Jean Jacques Picart)의 어시스트로써 참여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삐에르 베르제(Pierre Berge)의 요청으로 1996년 Yves Saint Laurent에서 컬렉션 디렉터로 기성복을 입고 예술 감독이 되었다 이것이 생로랑 과 에디 슬리먼의 첫 만남이다.
에디 슬리먼은 쿠튀르 아뜰리에 (Ateliers de Couture)에 기반을 둔 쿠튀르의 정신을 남성적인 것으로 뒤바꾸고 격식을 차려입는 것과 테일러링을 재해석하여 이브 생로랑 고쉬를 소생시켰다.
그 후 1998년 에디 슬리먼은 엔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한 Kris Van Assche를 Gauche Homme 라 인을 위해 자신의 퍼스트 어시스턴트로 임명하게 된다.
이때 같이 일한 4명의 어시스트들이 있는 데 Kris Van Assche , Lucas Ossendrijver, Nicoals Andreas Raralis 그리고 Martyn Bal이다.
그 후 스키니 실루엣의 시작을 예고하고는 가을 겨울 2000-2001 블랙 타이 컬렉션 이후 입생로랑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
그는 프라다 그룹에 참여하며 질 센더 라벨을 디자인할 것을 제안받기도 하였지만 디올의 맨즈 디 렉터 자리의 직책을 안고 디올로 새둥지를 틀게 된다.
그는 2001년 9월 Dior homme라인의 런칭과 함께 정신과 체계화 된 정체성을 만들었다 그 후 그는 그의 스타일과 새로운 남성성을 만들었다.
스키니 한 바지 또는 슬림 한 청바지, 핏된 자켓과 고급 넥타이 2000년대 초반 거리는 에디 슬리 먼의 ‘Rock’에 물들었다.
그가 디올에서 디렉터 자리에 있을 때 칼 라거펠트 (샤넬의 전 수장)와의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칼은 에디의 스키니 한 옷을 너무 입고 싶은 나머지 엄청난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다. 2001년에 13개월 동안 42kg을 감량하여 마침내 에디 슬리먼의 스키니 한 슈트를 입을 수 있게 된다.
# 2000년대 그의 영향
2002년 4월, 에디 슬리먼은 뉴욕 CFDA에서 올해의 국제 디자이너로 우승자가 된다. 그는 특히 Libertines, Daft Punk, Franz Ferdinand, The kills와 같은 밴드의 무대의상을 만들었으며 Mick Jagger, Beck, Jack white의 의상도 만들었다.
그는 Dior Homme의 런웨이 사운드 트랙에 밴드 음악을 삽입했는데 Underground 혹은 Readymade Fc 와 같은 아방가르드한 아티스들을 참여시켰다. 또한 Phoenix, The Rakes, Razorlight 와 같은 그룹도 참여를 하였다.
특히 2006년 그는 많은 영구의 밴드들을 발견하였는데 These New Puritans 그들은 2007년 1월 마지막 Dior Homme 쇼를 위해 Navigate를 작곡하였다.
그의 스타일과 매력은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베를린 시대와 관련이 있으며 동 베를린의 예 술적 감각을 대표하며 그의 첫 디올 옴므 컬렉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Kunst-Werke 아트 센터의 입성하게 되고 2003년 9월 Steidl이 발행한 동베를린에 대한 사진 에세이와 함께 레지던 트 프로젝트를 발표하게 된다.
# 또 다른 에디, 포토그래퍼의 삶
2007년 7월 에디는 Dior Homme의 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를 잡기 위해 디올은 레이 불의 재정적 제안까지 했지만 실패했으면 슬리먼은 자유를 되찾고 사진가로서의 일을 하기를 원 했다.
그 후 에디는 유럽의 여러 전시회를 리스본의 Ellipse 현대 미술재단, 암스테르담의 박물관, 베를린의 Arndt Partners 갤러리, Dan Colen, Nate Lowman, Dash, Musac 및 파리의 Almine Rech 갤러리에 연결하였다.
몇 년 후, 그는 John Baldessari, Ed Ruscha, Chris Burden, Sterling Ruby, Mark Hagen, Aaron Curry, Patrick Hill 등 캘리포니아 예술가들과 단체전을 열었다.
LA의 전시회는 2001년 2월 파리의 Aimine Rech 갤러리에서 전시가 진행됐으며 브뤼셀 갤러리에서 1주일 동안 개인전을 진행하고 추후 미국에서 그의 친구 Gus Van Sant 와 미국 예술가 Oscar Tuazon 과 함께 Fragments Aaericana 전시를 열었다.
캘리포니아 사이클은 2011년 11월 Moca La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었으며, 에디는 캘리포니아의 모든 사진들을 통합 한 사진 설치를 선보인다. 또한 California Song 전시회는 개막식에서 No Age 그룹의 콘서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2011년 11월 11일에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고 이 행사는 에디 슬리먼과 Commonwealth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의 주제로써 촬영이 되었다.
에디 슬리먼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2010년 LA에 정착하였다. LA는 입생로랑 시절부터 함께해왔던 도시였다.
그는 캘리포니아 유학에 전념하고 여러 주제 인 캘리포니아 사이클을 시작하였으며 2011년 말 그는 JRP-Ringier에서 10년간의 패션과 사진을 담은 Anthology를 출판하였다.
# 전설의 시작
그는 2012년 입생로랑의 부름을 받아 Stefano Pilati를 대신하여 입생로랑의 다시 한번 크리에이터로 임명받는다.
그는 입생로랑에 와서 먼저 무슈 생로랑이 1966년 최초로 여성 기성복 라인인 Saint Laurent Rive Gauche를 발표하여 어성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사회 참여적이며 당시 시대상에 본능적으로 어울렸던 브랜드의 창립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Yves Saint Laurent에서 과감히 Yves 를 제거 후 Saint Laurent으로 브랜드 네이밍을 바꾸게 된다.
2013년 F/W옴므 쇼에서 그는 전설의 쇼를 열었고 그 쇼는 에디 슬리먼의 추종자를 만들었으며 아직도 수많은 팬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 유가 아닐까 싶다.
그는 2015년에 24 rue de l’Universite에 위치한 새 워크숍에서 재개하였고 2016년에는 2016년 f/w 남성 컬렉션과 여성 컬렉션의 일부를 할리우드에서 개최한다. 처음으로 패션 하우스가 미국에서 퍼레이드를 시작하게 된 일이다.
# 안 좋은 끝
2016년 이후 그는 Kering (생로랑 소속의 그룹)과의 계약 문제로 마찰을 일으켰고 케링 그룹은 Anthony Vaccarello가 그를 대신해 도착한다고 발표를 냈다. 케링 그룹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했 으며 2016년 6월, 파리 상업 법원은 스타일리스트와 합의하여 1,300만 달러를 지불하도록 명령하였고 그는 그렇게 생로랑을 떠나게 된다.
# 새로운 둥지 Celine
2018년 1월 21일 깜짝 발표가 패션계를 들썩이게 한다. 피비 파일로가 떠난 Celine의 새로운 디렉 터가 에디 슬리먼이라는 소식을 세상에 알린다. 이와 함께 Celine은 에디 슬리먼에게 남성 라인을 런칭시킨다.
에디 슬리먼은 생로랑에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로고를 바꾸는 일을 먼저 했다. 현대 적인 이미지를 위해 기존 Céline에서 악성을 제거한 Celine으로 브랜드 네임을 바꾸었다.
이 당시 에디는 Celine의 인스타 계정에 있던 모든 게시글을 삭제하였는데 이 당시 피비 파일로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2018년 19 f/w를 시작하고 그는 올드 셀린의 팬들에게 이건 생로랑이 아니냐는 비아냥과 질타를 맞았고 2020 f/w 까지도 올드 셀린의 팬들에게 비아냥을 듣고 있다. 그는 피비 파일로의 모든 것을 없앤 나쁜 놈이기에.
# 끝맺음
에디 슬리먼은 많은 남성들을 마르게 했으며, 마초적인 유럽의 분위기에 새로운 반항아였고 마른 남성들에게는 빛과 같은 존재다.
에디 슬리먼은 그의 색이 짙은 ,검은색 같은 디자이너이다. 그는 생로랑 디렉터일 당시에는 ‘디올 같다’ 들었으며 현재 셀린의 디렉터 자리에서도 ‘생로랑 같다’를 듣고 있다.
어딜 가든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한 디자이너이기에 이런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다 하지만 이게 에디 슬리먼이고 이게 현재의 셀린이다.
누가 뭐라 해도 락시크는 에디이며 그의 스타일은 늘 그래 왔듯 트렌디함과 동시에 그의 색을 표현해내고 있다.
현재 미니멀리즘과 해체주의가 넘쳐나는 이 패션판도에서도 그의 락시크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