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거펠트를 기리며
#Karl Lagerfeld
“개성은 비교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흰머리 포니테일, 목을 감싸는 셔츠, 디올 슈트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며 항상 반려묘 슈페트 와 있는 남자
샤넬, 펜디의 디자이너 그리고 현재 천사들의 디자이너가 된 칼 라거펠트에 대하여 써 내려간다.
#디자이너가 되기 전 칼 라거펠트
1933년 9월 10일 독일의 함부르크 도시에서 연유 사업을 하던 스웨덴 출신의 아버지와 속옷 판매 원인 폴란드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칼은 Jurgen Fuhlendorf 사립학교에서 몇 년간 수업에 참석했었고 비스마르크 학교에서 2년간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던 결정적 계기는 1949년 12월 13일 함부르크에 있는 Esplanade 호텔에서 Christian Dior의 런웨이를 어머니와 함께 갔던 일이었다.
디올의 런웨이를 본 후 칼은 모델들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1952년 칼과 그의 어머니는 독일을 떠났고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로 정착하게 되고 그는 Montaigne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Karl Lagerfeld 그리고 Yves saint Laurent
그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일을 한 후 1954년 파리의 볼테르가로 이사를 하고 디자이너로 서의 꿈을 그려나갔다.
그는 1954년 11월 25일, 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국제 양모 사무국) 대회에서 코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드레스 부문에서는 Yves saint Laurent이 1위를 차지한다.
배심원 중 한 명인 디자이너 Pierre Balmain은 칼을 본 후 자신의 조수로 채용하게 된다.
IWP대회 이후 칼과 생로랑은 라이벌 관계가 지속되며 칼 라거펠트는 발망으로 입생로랑은 크리스챤 디올의 조수가 된다.
사적인 부분에서도 둘은 복잡하다. 이 당시 칼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인 Jaques de Bascher가 있었는데 그는 또한 Yves saint Laurent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후 3년 뒤 1959년, 칼 라거펠트는 Jean Patou의 패션 디렉터가 된다.
조금 뒤 그는 오트 꾸튀르 보다는 기성복을 만드는 독립적인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작업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비슷한 시기 생로랑은 1958년 크리스찬 디올을 뒤이어 디올 하우스의 디렉터 자리를 맡게 된다.
오트 쿠튀르를 이어 나가는 생로랑과 달리 기성복이라는 새로운 진화의 패션 형태를 지향하는 칼 라거펠트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 당시 패션계는 오트 쿠튀르가 주류였으며 기성복은 새로운 형태의 패션이었다.
#Chloé
1963년 칼 라거펠트는 Chloé의 악세서리 라인의 디자이너가 되게 된다.
그의 감각을 높게 평가한 Gaby Aghion은 그를 Chloé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하였다.
Chloé의 설립자인 Gaby Aghion의 밑에서 그렇게 기성복에서의 유의점들을 배우며 성장해 나갔다.
그렇게 1970년대 Chloé 는 칼 라거펠트가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쌓게 해주는 시발점이 되고 칼 라거펠트는 Chloé 브랜드의 특징인 여성스러움과 로맨티시즘과 자신의 감각을 더하여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다.
그렇게 칼 라거펠트는 Chloé에서 1983년까지 20년가량을 일하게 된다.
#Fendi
1965년 칼 라거펠트는 로마의 Fendi 하우스에서 디자이너로서 일하게 된다.
칼 라거펠트는 Fendi에서 모피의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칼 라거펠트는 Fendi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후 모피에 드레이핑을 하기 시작하였고 기존과 다른 느낌의 모피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 후 그는 지금 우리 가 알고 있는 Fun Fur라는 FF로고를 만들게 된다.
FF로고는 현대 펜디의 옷, 가방, 악세서리등 모 든 곳에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인연이 된 칼 라거펠트와 Fendi는 그가 잠들 때까지 인연을 맺는다.
# Karl Lagerfeld
1984년 칼 라거펠트는 자신의 이름을 건 기성복 브랜드 Karl Lagerfeld를 런칭한다. 그 후 Cora-
Reveillon그룹이 Karl Lagerfeld를 인수하게 된다.
#Chanel
1983년 칼 라거펠트는 Chloé서의 디렉터로서의 계약을 종료한 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Chanel로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다.
콧대 높은 프랑스 브랜드가 새내기 독일인 디자이너에게 러브 콜을 보내는 전무후무한 이슈였다.
그 해 오트 쿠튀르와 기성복 두 개의 라인에서 샤넬은 성공한다.
칼 라거펠트의 샤넬에 대한 미학은 가브리엘 샤넬 스타일의 기본 색상 인 흑백 대비를 기반으로 하였다.
이러한 기반으로 가브리엘 샤넬이 죽은 뒤로 정체성을 잃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가던 샤넬을 칼 라거펠트는 단숨에 파리, 더 나아가 전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어 놓는다.
그의 첫 오트 쿠튀르 쇼가 끝난 후 기자들은 세상에 외친다. “죽은 코코 샤넬이 돌아왔다.”
칼 라거펠트는 고리타분한 샤넬의 옷들에게 젊음을 불어넣었고 아틀리에서 특별한 소재를 만들어 젊음과 클래식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기에 칼 라거펠트의 샤넬은 남녀노소 모두들을 사로잡기 에 충분하였다.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칼 라거펠트는 오트 쿠튀르와 Prêt à Porter를 이어갔으며 계속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2019년 그의 생이 마감하기 전까지 샤넬의 수장으로서 샤넬을 아름답게 빛내었다.
# 칼 라거펠트와 지드래곤
한국에 많은 사람들은 칼 라거펠트라는 이름을 지드래곤 때문에라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파리 패션쇼에서 지드래곤이 같이 사진 찍는 할아버지.
지드래곤과 칼 라거펠트는 2014년 처음 만나기 시작했으며 2015년 카지노, 2016년 폴라로이드 컬 렉션에 참가한 유일무이한 동양인 남자 아티스트가 된다.
매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지드래곤과 칼은 웃는 표정으로 서로를 반기고 있었다.
샤넬과 지드래곤은 계속적인 관계를 맺었다.
2017년 6월 26일 샤넬은 공식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등 지드래곤 광고 영상을 전격 공개하였으며 지드래곤을 통하여 샤넬 가브리엘 호보 백을 홍보하
고 공식 엠버서더로 지드래곤을 지정하였다.
지드래곤은 서울에서 개최한 Chanel privee에서 칼 라거펠트가 찍은 사진 모델이 되어 쇼룸을 장 식 하기도 하였다.
# 샤넬의 수장 칼 라거펠트
1983년부터 2019년까지 샤넬 쇼에는 항상 각자의 소리를 내지만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소리를 내는 색들의 조합, 고급스럽지만 젊은 느낌을 주는 트위드 자켓과 스커트들이 빠짐없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단 옷 두 벌만 가지고도 칼 라거펠트의 샤넬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매 시즌 그가 보여줬던 옷들은 우아하였고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트렌디하였다. 70세가 넘어가던 노후한 남성의 감각이라고 불리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니깐.
샤넬 패션쇼는 항상 보는 재미까지 더해져 있다. 매 시즌 우리가 샤넬의 패션쇼를 기다렸던 이유는 칼 라거펠트의 무대 구성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샤넬의 쇼는 단순한 무대에서 모델들이 무대를 걷는 것이 아닌 테마를 만들어 그 공간을 모델들로 채워 나갔다.
호텔, 공항, 카지노, 크루즈, 쇼핑센터, 도서관, 에펠탑 그리고 해변가 등등 무수히 많은 전후무후한 쇼들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패션쇼에서 영원히 회자될 만한 쇼는 2019 S/S Prêt à porter라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그는 Grand Palais를 해변가로 만들었다. 센강을 통하여 모래들을 퍼왔으며 인공 바다를 설치하여 완벽하게 해변가를 만들었고 시원한 룩을 통하여 쇼를 전개해 나갔다.
옷부터 미장센까지 모든 것 하나가 부족함 없이 완벽한 쇼였다.
# 그의 마지막 그리고
그쯤부터 칼의 끝을 알 수 있었을까? 항상 매 시즌 쇼의 피날레에 등장했던 칼은 2019 F/w부터 피날레에 등장하지 않았고 그의 조수인 Virgini viard만이 쇼에 나왔고 쇼가 끝난 직후 칼이 샤넬을 떠나는가, 칼의 건강이 악화되었는가에 대하여 무수한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후 2019년 2월 19일 칼 라거펠트의 사망에 대한 기사가 흘러나왔다. 많은 이들은 애도를 표현하였고 패션 역사상 가장 훌륭하였고 놀라웠던 디자이너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패션계는 우울해했고 동시 다음 샤넬 수장에 대한 많은 추측들 또한 쏟아져 나왔다.
늦은 나이까지 펜디, 칼 라거펠트, 샤넬 등 무수히 많은 브랜드의 수장을 겸하고 있었으며 매 시즌 놀라 운 착장을 보여줬던 천재적인 디자이너는 이젠 사람을 위함이 아닌 천사를 위한 옷을 만들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