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깊은 결핍 때문이었을까. 난 늘 잘하고 싶은 아이였다. 세상의 모든 칭찬을 먹고 자라난 괴물이 내 깊숙한 속에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린 시절 보호자 역할을 자처해야 했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늘 내가 맏딸인 걸 다행으로 여기셨다.
“덜렁거리는 네 남동생을 잘 챙겨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엄마가 네 덕분에 산다.”
부모님이 오지 않는 운동회, 더러워진 실내화, 하굣길 오롯이 비를 맞고 걸어가야 했던 때를 떠올린다. 때마다 덜 어려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랬음에도 그들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들의 뒷모습이 아주 많이 휘청거렸고, 연약해 보였으니 말이다. 삐거덕거리는 철제문을 열고 새벽을 개어 나가던 그들의 발뒤축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완벽주의적 성향은 실제의 나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포장했으며, 늘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었다. 엄격한 기준이나 강박으로 늘 편두통을 달고 사는 것 즈음은 괜찮았다. 나만 겪으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힘든 건 인간관계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 번 내 기준에서 벗어난, 감정을 상하게 한 친구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두루두루 잘 지내야 하는 사회생활 속 그러한 결점은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승진의 기회에서도, 오래된 친구와 만나게 될 때에서도 마음의 빗장을 열릴 새를 몰랐다. 완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리고 너를 사랑하고 싶다. 깊이 내재 된 불안과 허기를 뿌리째 걷어 깊은 장막이 드리뤄진 내 삶을 빛으로 밝히고 싶다. 사랑엔 조건이 없으니, 대가 없이 모두를 사랑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중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던 어린 소녀에서 벗어나 이제 조금씩 알을 깨어 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