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남는 말

엄마는 도망가지 않는다

by 이지연 사람사이

어떤 말은 오래 남는다.

아이의 마음에도,

어른의 마음에도.


며칠 전 학원 아이들에게

‘감사의 힘’에 대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원래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인데

원망과 미움, 불평 같은 말들이 들어가면

그 물이 점점 시커멓게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와 좋은 말들이

그 물을 다시 맑게 만든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 장면을 보더니 신기하다며

직접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학원에 있는 것들로

즉석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딸기를 사면 담아주는 빨간 통을

물받이로 놓고 종이컵에 맑은 물을 담았다.

먹물 대신 진하게 탄 커피도 준비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기분 나빴던 말이나

속상했던 기억이 있으면

한 마디씩 해 볼래?”

아이들은 한 사람씩 말을 하며

커피물을 한 스푼씩 떨어뜨렸다.

그때마다 맑은 물은 점점 시커멓게 변했다.


“이제는 좋은 말을 해 보자.”

이번에는 감사했던 일이나

기분 좋았던 말을 하면서

깨끗한 물을 한 스푼씩 떨어뜨리게 했다.

하지만 물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방 항의했다.

“선생님, 이거 언제 변해요?”

“이거 안 변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방법을 바꿨다.


한 스푼이 아니라 컵째로

맑은 물을 붓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물을 계속 퍼부었다.

점점 더러운 물이 넘쳐나고

그 자리에 맑은 물이 채워졌다.

“와!”

“선생님 물이 변했어요!”

아이들은 마치 큰 실험이라도

성공한 것처럼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야기다.

선생님에게는 어린 두 딸이 있었다.

특히 큰 딸 예랑이는 장난도 많고

말도 잘 듣지 않는 아이였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선생님 댁에 놀러 갔을 때

친구가 예랑이를 보며 장난처럼 말했다.

“너 그렇게 말 안 들으면

너희 엄마가 너 버리고 도망간다.”

그 시절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흔히 하던 말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바로 말을 고쳐 주셨다.

“나는 예랑이가 말 안 들어도 안 버려요.”

“엄마는 도망 안 가요.”

“그래도 엄마는 예랑이 사랑해요.”

그때는 선생님이 왜 굳이

그런 말을 예랑이에게

반복해 말해 주는지 몰랐다.

내 눈엔 선생님이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선생님의 말을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나는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아들에게 말했다.

“너 그렇게 엄마 말 안 들으면

너희 엄마도 너 버리고 도망간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들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그리고 가지고 놀던 로봇 장난감을

아저씨 쪽으로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놀랐고 아저씨도 놀랐다.

그 순간 아저씨는 내가 아들을

크게 혼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아들을 혼내기보다

아저씨의 그 말이 더 마음에 걸렸고

아저씨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남편과 좋지 않은 관계 속에서 자란

아이였다.

어린 마음에도 혹시

엄마가 떠나 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어른은 아이의 그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할까.

나는 아저씨께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렸지만

아들을 크게 혼내지는 않았다.


그러자 아저씨는 말했다.

“애만 감싸네.”

“애 버릇없이 키우겠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문득

선생님의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엄마는 도망가지 않아요.”

“그래도 엄마는 예랑이 사랑해요.”


더러운 것이 섞이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다시 맑아지려면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도 비슷한 것 같다.

어떤 말은 쉽게 마음을 더럽히지만

그 마음을 다시 맑게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배운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과 말투,

몸짓을 자주 돌아본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나에게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지.


아이들의 마음에

어떤 말이 남게 될지 생각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철이 들었다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