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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 Mar 19. 2021

현실감각이 무딘 사람들에게

힘들어하지 마세요

나는 현실감각이 없다. 항상 붕 떠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현실감각이 없다는 말이 마치 약을 한 것처럼 몽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각능력이 열등하다. 흔히 말하는 오감이라고 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무언가를 봐도 구별을 잘하지 못하고, 어떤 것을 들어도 다 비슷비슷하고, 뭔가를 만져도 별 감흥이 없고, 뭐가 맛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내가 이상한가 해서 인터넷에 '현실감각이 없어요'라는 식으로 열심히 검색해도 나와 같은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감각이 무뎌요'라는 식으로 검색해도 그저 통증과 의학에 대한 얘기만 나온다. 답답한 일이다. 어릴 때는 누구나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 집은 다른 집과 다른 특별한 맛이 있다며 맛집 리스트를 줄줄 외우고, 이 가수는 참 음색이 좋아라며 각자의 취향을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미칠 노릇이었다. 난 다 똑같아 보이는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 


내가 잘 몰라서, 무지해서 그런가 보다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다. 알면 알수록 취향도 발달하는 거라고 생각하여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인테리어, 가구, 소품, 색 조합, 패션, 노래, 와인, 음식, 요리, 악기, 향수, 명품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공부하면 할수록 벽이 느껴졌다. 와인을 맛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리로 외워서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엔 다 흙 맛이다, 신맛이다 이것 밖에는 모르겠는데 나를 계속 속이는 기분이었다. 맛집에 가도 그냥 맛있다는 건 알겠지만 뭐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는 알지 못했다.


취향이 무딘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였지만 무딘 감각이 사회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세세하게 자료를 검토하지 못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항상 점수를 까먹기 마련이었다. '내용은 좋은데 마무리가 약하네'라는 말을 항상 달고 살았다. 또한 내 상위 결재권자 중 한 명은 세부적인 것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항상 내가 넘긴 결재가 위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반려되면서 실무자들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더 꼼꼼하게 보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자괴감만 심해졌다.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라는 변명을 하기에는 나보다도 훨씬 경력이 적은 사람들도 나보다 더 세부 오류를 잘 찾아냈다. 결국 내 세심함이 문제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고, 집중을 하지 못하는 ADHD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다. 멍하게 살아가는 것만 같았고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다. 까탈스럽지 못한 내가 싫어졌고 일을 그만둘까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히 했던 MBTI 검사에서 나는 INTJ를 받게 되었다. INTJ는 세상을 논리적이고 넓고 구조화시켜서 파악하는 것을 주 기능으로 사용하는 반면, 타인과 감정 공감을 하는 것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현실적 감각이 열등 기능으로 부족한 부분이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감각이 무딘 것이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처음 듣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관점이 열렸고 나의 가능성과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일을 할 때 세부적인 부분은 잘 캐치하지 못하지만,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큰 틀에서 파악해서 흐름을 파악하여 업무를 하는 장점이 있다. 감각에 민감한 사람들이 A라는 것에만 집중할 때, 나는 A 하나만에는 집중하지 못하지만 A부터 D까지의 인과관계와 영향력 등을 파악해서 큰 틀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자 다른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결재가 올라왔을 때 세세하게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하기보다는 (물론 안 하는 것은 아니고) 이 보고서가 논리적 흐름이 잘 이어지는지,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는지, 인과관계가 잘 연결되어 있는지 등을 파악해서 피드백해주게 되었다. 내가 못하는 부분은 누군가 해줄 수 있을 것이지만 내가 잘하는 부분은 나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취향 또한 내가 잘할 수 없는 부분은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와인 맛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지만, 와인의 역사를 정리하고 브랜드를 분류하여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는 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음식 맛이 뭐가 다른지는 모르지만, 그 맛집이 성공하게 된 이유와 수익구조 회전율 등 외적 부분에 대해서 풀어내는 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설거지는 깔끔하게 못하지만 그릇들이 어떻게 배치되어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는 자신 있었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고 매정하다. 조용한 사람보다는 시끄러운 사람을, 무던한 사람보다는 예민한 사람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사람들만 선택받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나도 한동안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나를 끼워 넣느라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모든 것에는 반대되는 속성이 반드시 존재한다. 감각이 무던하다는 것은 곧 직관이 예민하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바라보기 나름이다. 세상의 판단에 나를 맞추지 말고, 스스로 관점을 만들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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