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3일의 감정
#1
나는 내가 누군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
수십 번 생각해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너무 많은 내가 있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야 성공한다는데 시작조차 어렵다.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이 페르소나 혹은 가면이라고 하던데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 왜냐하면 가면은 벗으면 진짜 내가 있는데 나는 벗어도 벗어도 진짜 내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변검술처럼 벗었는데도 진짜 내가 없다.
누군가에게 나는 조용하고 말이 없고 소극적인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쉴 새 없이 떠들고 호기심이 넘치고 밝은 사람이다. 어떤 집단에서는 카리스마 넘치게 수 십 명을 이끄는 사람이었다가, 어떤 집단에서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가 된다. 어떤 일에는 너무나도 꼼꼼하고 세밀했다가, 어떤 일에서는 누구보다도 무계획적이고 흐트러진다.
성격 특성이 비슷하면 좋으련만, 극단에 있다 보니 혼란스럽다. 한 때 너무 혼란스러워서 심리상담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진짜 나를 알고 싶어요." 라며 찾아왔던 나에게 상담사는 말했다. "왜 그게 중요하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진짜 나를 안다는 건 중요하지 않나? 어딜 가나 듣는 말이 진짜 너를 찾아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러면 성공과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라는 것 아닌가. 한 번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기에 공리를 의심하는 바보를 보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상담사로서 대하는 모습과 친구로서 대하는 모습과 가족으로써 대하는 모습이 다 달라요. 어느 게 진짜 나인 가요? 그런 건 없죠. 다 진짜 나예요. 그걸 받아들여야 해요." 하지만 내 모든 페르소나를 나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나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내가 많기 때문이다. 남들이 정한 기준과 시선에 따라 내 페르소나를 정하고 싶은 것이다.
#2
세상은 내향적인 사람에게 패널티를 준다. 그래서 나는 내 페르소나 중에서 내향적이라고 적혀있는 가면들은 살며시 밀어낸다. 그게 진짜 나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것은 내가 되지 못한다. 세상은 꼼꼼하지 못한 사람에게 패널티를 준다. 그래서 나는 또 그 가면을 밀어내 버린다. 그렇게 걸러지고 걸러진 나의 페르소나들은 사회가 원하는 그리고 칭찬받는 자아들이다.
예전에 이사를 잠깐 도와주러 온 형이 내 집이 더럽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구나 집은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이 더러운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틀이 있다. 극단의 지저분함과 극단의 깨끗함이 서로 강박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극단의 지저분함은 버려야 할 것으로, 극단의 깨끗함은 불편하지만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는 지저분하고 청소를 잘하지 않는 나의 특성을 부정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집을 깨끗하게 정돈하지는 못해. 그건 나의 성격이야.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라고 했더라면 정체성의 불안감은 덜했을 수 있다. 일단 나를 받아들이고 개선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난 왜 이렇게 칠칠맞을까. 이렇게나 게으르니 하는 일마다 잘 안되지. 오늘부터 무조건 성격을 바꿔야 해. 깔끔한 성격이 돼야 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를 지우고 그 뒤에 덧칠을 하고, 또 누군가의 말을 듣고 덧칠 위에 또 덧칠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처음 밑그림이 뭐였는지 알 수가 없다.
덧칠하고 수정한 부분까지도 '나'라는 그림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처음 그렸던 밑그림만 '나'로 봐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 깊은 깨달음과 답을 얻기에는 인생을 고작 삼십 년 남짓 살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남들이 하라 해서 덧씌운 그림만큼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확하다.
#3
삶이란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나의 여행이다. 나는 이 삶의 여정의 끝에서 찾게 되는 것이 '나'이기를 바라며 여행하고 있다. 끊임없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찾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잘 모르겠다. 자아라는 개념은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빨강을 제일 좋아해,라고 적었다가도 어느 만개한 벚꽃을 본 날에는 사실은 핑크가 제일 좋네,라고 해버린다.
자아는 마치 물감, 색이라면 채도와도 같다. 1~100까지 있다면 어떤 색은 78 정도쯤, 어떤 색은 32 정도쯤, 어떤 색은 19 정도쯤 있다.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이다. 그래서일까. 진짜 나라는 자아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는 생각도 든다. 그건 진짜 빨간색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딱 떨어지는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빨간색에 가장 가까운 답을 찾아가는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새로운 내가 생겨날 것이고, 변해버린 나와 기존의 나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고, 그 사이에서 진짜 내가 무엇인지 찾아나갈 것이다. 나는 내가 누군지 매일 잊어버린다. 그리고 매일 찾아 나선다. 그렇게 평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