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중 가장 특별한 시간
나만의 추억 가져보기
미국의 크리스마스를 느껴본 적이 있다.
미국 동부 유학시절, 혼자 살던 외로움에 지친 나는 짐을 정리하고 이모가 살던 서부로 이사했다. 이모가 살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2시간 정도 거리의 로즈힐이라는 마을이었다. 춥고 외로운 동부와 달리 따뜻한 서부의 날씨와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이 있는 연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마침 텍사스에서 살던 큰 이모 가족도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왔기에 집은 북적였다.
12월 초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오전, 요리하는 냄새가 온 집안을 감미롭게 감쌌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는 다 같이 둘러앉아 선물을 개봉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 같이 '그린치'라는 영화를 봤다. 어릴 적부터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다 함께 보던 영화라고 한다. 수 십 년을 봤기에 이제는 대사까지 다 외워버린 영화였지만, 크리스마스 때는 꼭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고 했다. 끝까지 봐야 한다며 지루한 영화를 잠을 참아가며 보던 그날의 크리스마스가 그 따뜻함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작년에도 똑같이 둘러앉아 요리를 먹고, 카드게임을 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그린치를 봤을 것이고 올해도 그랬을 것이고 내년에도 그럴 것이다. 변하지 않는 루틴은 안정감을 준다. 눈만 뜨면 세상이 변하는 시대에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그립다. 1년만 지나도 새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완전히 동네가 바뀌어버리는 요즘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나에게도 그린치 같은 연례행사가 있는데 바로 연말 베토벤 9번 합창교향곡 듣기이다.
대학생 때 나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를 했었고, 종종 클래식 공연을 들으러 갈 기회가 있었다. 항상 나에게 그런 공연 일정을 알려주던 형은 연말에는 꼭 합창교향곡을 들어보라고 했다. 꼭 연말이어야 하나요?라는 나의 엉뚱한 질문에 직접 가보면 알 거라며 웃었다. 연말의 예술의 전당은 마치 외국 같았다.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정장을 뺴 입은 사람들과 화려한 건물들과 조명. 마치 어른의 세계로 빨려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들어본 합창교향곡은 전율이 일었고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인류애와 사랑 그리고 음악의 감동과 전율. 그 뒤로 매년 연말이면 공연을 찾아들었다. 서울이 매진되면 기차를 타고 인천이나 수원을 가서라도 들었다. 한 번은 대전을 간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마치 연말에 이 곡을 듣지 않으면 한 해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찝찝함이 들었다. 왜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그린치를 끝까지 보고 나서야 잠에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연애한다면 연인과, 결혼한다면 가족들과 매년 나만의 연례행사를 같이 공유하고 싶다. 그래서 그런 행사가 우리 가족의 정체성을 만들어주고, 아이들에게 추억을 심어줬으면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있잖아. 우리 연말마다 공연 보고 한해를 마감했잖아? 그때 참 좋았는데.'라고 얘기할 수 있는 얘깃거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나만의 그린치가, 평생 나눌 특정한 날의 추억이 있었으면 좋겠다.
뿌리라는 것이 주는 안정감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던 곳은 모두 허물어지고 사라졌다. 고향에 돌아가도 갈 곳이 없다. 내가 뛰어놀던 곳들은 휘황찬란한 건물들로 바뀌었다. 게임을 하던 문방구 집도 사라졌고 과자를 사던 슈퍼도 없어졌다. 몸을 담아둘 곳이 없으니 마음을 담아둘 곳도 없는 것 같다. 매일같이 변하는 한국사회가 미워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밉다 해도 세상은 계속 변할 것이기에,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담아둘 곳을 만들어야겠다. 그린치처럼 합창교향곡처럼 매일 또다시 덧대어질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겠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다들 나만의 연례행사나 추억이 있을까? 혹은 만들고 싶은 것들이 있을까?
* 합창교향곡을 연말에 듣는 건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1918년 독일에서 12월 31일에 합창 교향곡을 연주했던 콘서트가 있었는데, 한 일본의 방송국 직원이 이를 소개하면서 독일에서는 매년 합창 교향곡을 연주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매년 연말에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 전통적인 연례행사로 굳어졌다는 설이다. 한국과 일본만 연말에 합창 교향곡을 듣는다는데 진위여부를 확인을 해보진 않았지만, 설령 그런들 뭐가 중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