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대로야

by 연필소년


나는 종손이고 장손이다.

1년에 제사만 열 번이 넘었고 명절 때면 수십명이 찾아왔다. 벌초만 1박2일을 했고 어릴 때는 친척들이 놀러온다고 마냥 좋아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구정만 같아라. 매일 이렇게 시끌벅적 했으면 좋겠다.너무 좋다 명절이!! 그랬었는데...


이제는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 수록 명절이 쉽지가 않다.


사회에서 1인분을 할 때가 오면 집안에서도 하나하나 책무가 늘어간다. 장손으로서 잘 사는 모습도 보여야 되고 주변 친인척들의 경조사도 챙겨야 한다. 그 뿐인가 동네 어른을 만나서 인사를 할 때면

" 어 누구 아들! 그래 나가서 뭐 하고 사니?" 하는 질문들이 아무렇지 않게 폐부를 쑤신다. 어려서 공부도 곧 잘 했고 명석해서 뭘 해도 할 놈이라는 소문이 그득했는데 이제는 뭐 장가도 못 간 빈털터리에 어디 가서 뭘 하는지 집에 잘 오지도 않는다고 수근거릴 게 뻔하다.


명절엔 그게 더 하다.


이제는 장성해서 일가를 이룬 자식들에 대해 푸념 하는 친척들은 모른다. 애들이 속을 썩인다. 손주들이 시끄럽다. 자꾸 뭘 한다고 일을 벌인다 등등. 별 일 없는 일상이고 여전히 고달픈 인생이라고 내 놓은 근황들이 아버지의 속을 썩힌다. 어머니의 고개를 돌아가게 만든다. 하나뿐인 아들은 이렇다 저렇다 뭐 내 놓을 이야기가 없다. 큰 성공도 필요없고 그냥 남들 사는 만큼만 살고 결혼해서 애 놓고 식구끼리 부대끼면서 라도 살고 있으면 뭔 할 말이라도 있는데 이 놈은 근 10년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나이는 들었는데 변한 게 없는거지. 그러니 가타부타 할 말이 없다.


단조로운 인생에 그나마 새로울 거라곤 자식들 얘기 밖에 없는 어르신들 세상에서 철저하게 고립무원이 되어 버리고 가는 부모님의 씁쓸함이 명절이 될 때마다 먹물같은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걸 보고는 한다. 한 때는 그 걸 한번 바꿔보고 싶어서 더 열심히 일 한 적도 있다. 사람마다 운이 트는 시기가 다르니 열심히 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빛을 볼 거라고 믿었다. 가진건 부랄 두 쪽 뿐이지만 성실하게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근데 10년쯤 되고 보니 인생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세상은 신랄하고 사회는 냉정하다. 인생 모른다 모른다 하지만 마흔을 넘기고 나니 어느정도 가닥은 잡힌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이 나도 모르는 새 찍혀지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또 어찌 될 지 모르지만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기에 나를 지켜봐 주고 기다려 주는 이들의 시간은 나의 것과 같지 않다. 마음은 조급해 지고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끝난 건 아닌데 결판은 난 것 같은 이 서늘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것이다.


나만 그대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그대로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세상의 경력을 쌓으며 일가의 세대교체를 조금씩 준비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제 은퇴를 하고 조용히 노후를 즐기면서 하루하루 보고 싶은거 가고 싶은 곳 입고 싶은 옷을 가고 보고 입으며 인생을 정리 하고 뒤를 이은 자녀들이 기반을 단단히 하며 자녀를 키운다. 언젠가 또 다시 순환하여 자신들의 성씨를 잇고 명맥을 유지해야 할 때 제대로 넘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뭐 특별한 게 없어도 그게 인생이다. 나는 그걸 못하고 있는거고 그래서 나는 나이만 먹었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이다. 심지어는 성공의 여부같은건 전혀 상관도 없는건데 그건..


그래도 이를 앙다물고 또 결심을 한다.


다음 명절엔 그 다음 명절엔 더 볼품 없어지지 않게. 그래도 이 놈이 아들 노릇도 잘 하고 아무 가진 것 없이도 이 험준한 세상에서 뿌리를 박고 잘 살아서 대단하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열심히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이전에도 열심히는 살았지만...뭐 어쩌겠는가 운이라고 치면 운이 없는거고 실력이라고 치면 실력이 없는 거지. 돈 버는 재주가 없는거고 수완이 뛰어나지 못한거다.


비교를 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냥 나는 나만 보면 된다. 안타까운 것은 부모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보듬어 줄 여유가 없다는 것. 그저 몸 건강한 것 하나가 유일한 자랑거리일 뿐인 불효자.


부디 다음 명절때는 나의 시간도 제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혼자만 그대로인 것은 또 너무 외롭고 처연하니까.


너도 그대로구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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