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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년 Nov 18. 2021

아버지.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어디에 다녀오셨나요. 주머니엔 뭘 넣고 오셨나요.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무슨 즐거운 일들이 있으셨나요. 몇 번이나 "어이~"를 외치며 손을 흔드셨나요. 아랫마을 현회아저씨 댁에 마실은 다녀오셨나요. 사과 과수원의 한귀퉁이로 몰아놨던 반짝이는 은박 비닐은 모두 걷으셨나요. 


아버지, 저는 오늘 소주를 한 잔 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 혀가 꼬부라지지 않았습니다. 연거푸 한 숨 짓지도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 술을 배운 시절의 저는 뭔가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마시는 게 술인 줄 알았습니다. 마시면 좋고 왁자지껄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을 마음대로 표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벗들과 함께 하는 좋은 것이 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할 것 없는 하루 한 달을 지워내기 위해 마시는 것 같습니다. 고만고만한 하루를 게워내려고 마시는 것 같습니다. 내일 역시 변함없는 오늘일 것이란 확신을 견디기가 힘들어 마시는 것 같습니다. 


 쾅하고 닫히는 현관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서면 적당히 달궈진 방 안의 온기가 얼굴에 부딪혀 따갑습니다. 몸에 묻은 먼지와 피곤을 씻어내고 자리에 앉습니다. 달리 건넬 말도 없지만 딱히 들어줄 이도 없습니다. 적막을 친구 삼아 술을 따랐습니다. 이제는 시끄러운 곳도 번화한 곳도 싫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적당히 따라 부르기 좋을 정도의 시끄럽지 않은 노래를 틀어놓고 한잔 한잔 따라 마십니다. 어떤 기대나 설렘보다는 좋았을지도 몰랐거나 좋을 법했던, 아쉬웠던 순간들을 안주삼아 마십니다. 


 많은 순간들이 취기를 따라 올라옵니다.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왜 그랬을까. 돌이킬 수 없는 의문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파노라마가 되어 눈앞에 펼쳐집니다. 술은 기억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데 저는 오히려 생생하게 떠오르는 많은 기억들에 괴롭습니다. 


그렇게 짧은 여행이 끝나면 긴 후회가  밀려옵니다. 한숨이 나옵니다. 버석거리며 주변을 치우고 눕습니다. 


'아..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냈다.'


  그 옛날, 술에 취해 계단을 오르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를 기억납니다. 평소엔 절대 들을 수 없는 신발을 끄는 소리.. 터벅 스윽.. 터벅 스윽.. 쿵. 아, 오른쪽 벽에 부딪히고 왼쪽 손으로 계단 난간을 잡던 소리까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럴 때면 불을 끄고 자는 척을 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뜬금없는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어색했고 못마땅했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열리는 방문 사이로 진한 술 냄새가 퍼져 들어왔습니다. 


"자냐?"

"..."

"크흠.. 자라..."


가끔은 굳이 저를 흔들어 깨운 적도 있었죠. 


"아들.. 우리 치킨 시켜 먹을까? 아버지랑 소주 한 잔 할까?"

"고등학생이 무슨 술이에요. 아, 주무세요 얼른.. 아 술 냄새."

"그래.. 아들.. 공부 열심히 해라.. 얼른 자고. 아부지 나간다~미안하다~"


양말을 벗으시고 목이 타시는지 물을 연거푸 마시고는 tv를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큰 숨을 쉬어내던 아버지의 수많은 날들.


아버지, 저는 몰랐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목 안에 자물쇠라도 채워진 듯이 쉬이 나와주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 수록 겁이 많아진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디로든 가서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어른도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용기를 쥐어 짜내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때의 아버지는 제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셨을까요. 

얼만큼의 용기가 필요해 그렇게도 많은 술을 드시고 오셨던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못하셨던 그 말은 무엇일까요. 혹시 제가 지금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과 같은 말일까요.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다.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셨으면 좋겠다. 

으스러지게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으면 좋겠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그 무릎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서 그냥, 딱히 이유가 없어도 한 번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셨을까요.


아부지..같이 소주 한 잔 할까요? 내일의 숙취 따위 생각하지 말고 아주 찐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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