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거지 뭐."
"애들 크는 거 보는 재미지."
"별 게 없더라 인생."
대학을 졸업 후 10년이 넘도록 1년에 두번씩 가져오던 모임이 있다. 사람 사귀는 재주가 시원찮은 내게는 유일한 또래친구들과의 모임이다. 한 5년간은 세상에 뿌리박고 자리 잡느라 다들 바쁜 모양새로 똑같이 살았다. 누구는 회사에 취직해서 누구는 장사를 시작하고 누구는 사업을 구상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불안한 미래를 나눠쥐고 서로의 용기를 복돋아 주고는 했다.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더니 10년이 넘으니 대부분 자리를 잡고 안정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만 빼고..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우리의 하루는 다르다.
모든것이 가족에 맞춰진 일상을 사는 그들은 오롯이 자신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나의 일상을 부러워 하지만 그 시기와 질투에 진심이 없다는 것을 부정 할 수는 없다. 그냥 조금 힘들다고 친구에게 징징대는 것일 뿐 머리부터 발 끝까지 보람과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내 말문이 턱 막혀버리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혼자인 이와 가정을 꾸린 이는 이미 그 색깔이 많이 다를 테니까.
손 윗사람이 잔소리하듯 결혼에 대해 즐비하게 늘어놓는 친구들의 한결같은 맺음말이 그것이다. 그냥 사는거고 별 게 없는게 인생이라고. 주말마다 새로운 곳으로 가족들을 실어 나르며 가장의 도리를 하는 재미로 달력을 온 갖 계획으로 가득 채우는 게 재미라고. 내 시간이 너무 없어 언짢아서 그래서, 니가 부럽지만 부럽지가 않기도 하고 그렇다고. 나는 아닌데 나는 너희들이 부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내가 나인 것에 만족했는데 그런데!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아니 아주 많이 조금 버거워 지는게 사실이고 그래서 좀 우울한 요즘이다.
내가 원한 것이었다. 40년쯤 살다보니 나라는 인간에 대해 객관적일 수가 있어졌고 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불안은 가지고 있지만 결혼과는 영 맞지 않는 체질이란걸 알고 있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고 하겠지만 그야 말로 결혼을 해 본 사람은 알 수 없는 세계이니 내가 더 정확히 알 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비혼 경험자(!) 이니까. 그러나 밀려드는 시간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대개 공상과 무의미한 계획들로 채워내곤 하는데 이게 썩 좋은 방법도 아닌 것이 실현 가능성이 적거나 멀다 보니 매 번 후회와 반성이 거듭되며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것,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도 너무 큰 의미와 동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혼자인 삶에도 자격이란 것이 필요할까. 좀 더 촘촘히 계획한 자아실현을 위해 나아갈 줄 아는 이들만이 이 고독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일까. 그냥 행복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들과 알콩달콩 엮어가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는 그 마저도 지겨워 할 것이 분명한데..책임을 등지고 도망갈 것이 뻔한데.. 그래도 아니하지 못한 것보다는 나은 삶인 것일까 그것이..하루를 살아내는 것에도 수 많인 이유를 가져다 붙이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내 삶에 무책임 하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사막인듯 척박하기 그지없는 인생의 한 가운데서 물을 찾고 싹을 틔우려 하는 것은 어째서 인걸까. 다 귀찮고 다 싫은데, 부질없어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데도 쉬이 놓지 못하는 것일까. 내 하루가 의미있는 색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걸까. 푸르고 하얗고 빠알간 것들이 생기길 바라는 것일까.
어쩌면 아직은 알 수 없기 때문이겠지.
길었던 지난 날들이 결코 의미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때가 올 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인생은 10년, 20년 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한 줄기 아니, 한 가닥의 기회 정도는 누구나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그렇게 살자.
덧 없는 계획들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루 하루 버텨내야 하는 의미를 발굴해 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