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정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모든 중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절대로 술에 중독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틀 걸러 한번 소주 한두병 마시는게 무슨 중독이야? 이정도면 대한민국 남자 평균 아닌가?
...
완벽하기 그지없는 중독자의 핑계, 변명.
늘어나는 체중과 반비례로 떨어지는 체력.
안그래도 몸을 쓰는 일이 많은 직업인데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일한 내게 주는 소소한 보상이니 하는 구실을 붙여가며
부득불 술을 퍼마셨다.
정확히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리봐도 저리봐도 중독이 틀림 없었다.
쌓여가는 술병 만큼 날아가는 기억들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뇌까리는 후회의 편린들.
이제는 진짜 마시지 않고 마시더라도 중요한 만남이나
한달에 몇 번 날을 정해서 다섯 손가락 접힐만큼만 마시겠다.
웬 걸, 의지박약, 작심삼일.
꼴에 혼술이 유행이라며 집구석에 처박혀서 마시는 게 다인 그야말로 답도없는 놈. 세 개나 되는 소주잔을 씻기도 귀찮아서 병 째로 나발부는 쪼다같은 인생.
한심했다. 한심하지..누가 볼까 창피하다.
마침내 한심함이 극에 달하니까 나란 놈도 위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기는 하나보다. 엄청난 동기나 계기도 없이 갑자기 습관처럼 마시던 술을 열흘이나 마시지 않고 있다니. 다시 헬스장 이용권도 끊었다. 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나갈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지르고 뭐라도 해야한다. 술이 없어진 시간의 공백을 메꿀 무언가 필요했고 그 동안 내가 꿀잠이라고 생각 했던 수면은 술에 취해서였기 때문에 10시, 11시가 되어도 말똥말똥한 눈을 억지로라도 감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하루종일 힘들게 일을 했는데, 피곤해 죽겠는데 잠이 오지 않는 기 현상..
열 흘 그까짓 기간동안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을리는 없겠지만 일단은 애 쓰는 중이다. 블로그도 꾸준히 하려하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알코올에 뇌가 절여진 탓인지 단어도 생각이 나질 않고 문장도 엉망진창이다. 한 때는 술기운을 빌려 글을 쓰기도 했는데 점차 그마저도 못 할 지경이 됐고 이제는 맨 정신으로도 뭔가 한 줄 써내려가는 것이 버겁다. 나아지려나..
사소한 계기만 주어지면 또 술을 마실건 분명하다. 괜찮다. 마셔도 돼.
혼자 마시지 말고 안주 꼭 챙겨먹고 누군가 대화할 사람이 있는 곳에서 폭주하지 말고 천천히. 기쁨도 슬픔도 좌절도 분노도 같이 구겨 넣어서, 행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슬퍼졌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을 나누기 위해서 좌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어서기 위해서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하기 싫어서 그 언짢음을 날려 버리려고.
그렇게 마시자. 가끔씩.
더 이상은 잊고 싶어서 마시지 말자.
고된 하루도 지난한 한 해도 모두 나의 것이다. 온전히.
기왕 중독이 될 거라면..그래, 차라리 평범하고 지루한 그래서 애달픈 나의 일상과 이상에 중독되어 보는 건 어떨까. 그게 뭐든 술에 담겨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