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죽음을 본 적이 있다.
그저 뉴스에서나 볼 법 한 일이었음인데, 내 삶의 반경 어디에도 일어나지 않는 그러나 왠지 서글프고 나한텐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이내 잊어버리던 일들이 이젠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있을법한 일이 되어버린 죽음들을 만나고 있다. 몇 번이고 일어난 수도없이 일어날 주의하고 세심하게 바라봐야 할 일이 되었다.
그이가 죽음 이후의 절차를 밟기 위해 떠난 방 안을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비록 그이의 삶을 알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공감이 될 법한 분투와 외로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리고 그 삶의 흔적은 불과 서너시간이면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무도 없었던 듯이..
몇 번, 지인들에게 그런 우스갯 소리를 했다. 이따금씩 밤마다 죽음을 대비하고 있다고.
죽음의 준비는 크게 어렵지 않다. 잘 때 반바지에 티셔츠라도 꼭 입는 것이다. 그리고 자다가 몸이 급격히 이상징후를 보이면 최선을 다해서 침대 밑으로 내려가 방바닥에 반듯하게 눕자고 되뇌이는 그 것이다. 특수청소를 하는 분들의 영상에서 본 적 있는데 부패가 심한 시신이 침대 위에 있으면 처치가 상당히 곤란하고 그 뒷감당을 유족들이 매우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보고 난 후부터 그리고 그런 일들이 내 주변에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주욱 그래왔던 것 같다.
"별 시답잖은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앉아있다."
맞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뭐, 알 수 없잖은가.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해 둔다면 나중에 여러 사람을 불쾌하지 않게 만들고 떠나왔다는 생각에 뿌듯 할 수도?
바깥에 우수수 쏟아져 비를 맞고 있는,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온기가 닿았을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알 것 만 같은 그 외로움과 슬픔들이 전해져 마음 한 켠이 아리다가 불현듯 이제는 마음껏 슬퍼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현 시점의 내 삶은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대체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은데 왜 그걸 외면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을 잊으려고 기쁘게 해 줄 것들을 찾는 것일까. 왜 억지로 웃으려고 안달일까. 슬프면 슬프다고 말 하는 것이 어째서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것일까.
기쁨은 숨겨도 기쁨이지만 슬픔은 눌러담으면 더 커다란 우울이 되어 버린다. 그 우울을 벗어나기 위해 재밌고 즐거운 일을 찾는 수고는 또 얼마나 피곤한가. 하하 호호 한바탕 웃어버리면 털어버릴 수 있다지만 우울은 사라지지 않고 회색 뭉치로 협착되어 마음 안에 자리 잡는다. 엄연히 내 감정인 그 신호를 무시하고 피하다보면 질병으로 변해버려 억지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그 때의 선택지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우울을 기다리거나 내 삶의 종장을 맞이하거나.
나는 꽤나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행여 우는 소리가 새어 나가면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던 기억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왜 울었는지야 이제와선 알 수 없지만 한바탕 울고 나서 후련한 마음으로 잠들었던 건 분명하다. 개운한 그 느낌. 슬픔은 어느새 뭐든 어떻게 되겠지 하는 희망으로 그 색을 바꿔준다.
어른이라는, 있지도 않은 애매한 경계선을 넘은 후부터는 그래본 적이 없다. 그 어떤 슬픔이 찾아 들어도 찡하게 울려오는 코 끝을 부여잡고 눈물만은 흘리지 않으려 애쓰거나 고개를 돌려 버린 기억 밖에는 없다. 난 어엿한 어른이고 남자이기 때문에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는
슬퍼할 기회를 주자 내게.
눈물을 흘릴 시간을 주자.
눈물과 함께 슬픔도 흘려 보내야 한다.
내 슬픔의 대부분은 그리움이다. 대체로 회색 풍경이고 눈물을 동반한다. 그래서 외면했던 그 순간들 역시 꺼내 두려 한다. 온전히 슬퍼하고 그리워해야 언제든 마주 할 수 있다. 많은 지나간 것들과 떠나간 사람들이 더 이상 흐릿해지지도 바래지지 않아야 그이들과 함께했던 나의 삶도 구멍이 나지 않을 것 같기에.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모를 감정의 파도가 밀려와도 당황하지 말자. 이 낯선 익숙함.
외롭고 허망하고 슬프고 그립고 그래서 울음을 지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