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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Dec 13. 2019

과도

와 나에게 장난이 아닌 장난

체온에 놀라 눈을 떴다. 거친 감촉. 여자의 안경에  모습이 비쳤다. 동그랗고 빨갛다. 스파이처럼 초록색이 끼워져 있다. 나는  누군가를 올려다 보았지만 이런 각도와 대우는 처음이다. 초면인데 과도를 들이미는, 과일과 인간을 이해할  없었다. 저렇게 작은데도 날카롭고 뾰족한 과도가 신기했다. 위험한     알았다. 여자는 공기가 빠진 것처럼 작고 위축되어 있었다. 당신이 아무리 무해해도 이렇게 먹힐 수는 없어요. 고개를 움직여도 과육을 감싼 껍질은 단단히 밀착된 채였다. 노아가 보고 싶었다. 나무가   알았는데, 사과가 되다니.  모든  단단히 밀봉된 장난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장난이 아닌. 노아와 함께였을 때도 그랬다. 내가 아끼던 인형을 개구진 표정으로 숨겼을 , 허파가 달달 떨리도록 으르렁거렸다. 맛없고 텁텁한 사료마저 빼앗고 기다리라고 했을 때나, 아주 잠깐 내가 노아를 잃어버렸을 때가 그랬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포장되어 있는 장난. 그러나 나는 뜯어보지 못하는. 내가 죽고. 노아가 나를 아파트 화단에 묻고.  위에 사과나무 씨앗을 심고. 그런 것들 말이다. 여자의 엄지가 커다랗게 나를 매만졌다. 노아가 떠났다는    있었다. 여자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과도가 조명의 노란 빛을 사악, 사악 깎아내고 있었다.

 

 떠지지 않는 눈으로 사후 내내 노아를 생각했다. 축축한  아래 있었을 때부터, 폭죽이 터지듯이 나무의 위쪽으로 올라갔을 때도. 노아의 장난이 없는  지루했어. 여자에게 쥐어져서  2 죽음을 기다리는 지금도 지루하다. 장난인  같은데 장난이 아니다. 현관문이 열렸다. 조약돌이 굴러들어왔다. 어린 아이의 웃음과 개의 짖는 소리가 현관부터 거실까지 차례대로 줄을 섰다. 개가 나에게 코를 들이밀고 저돌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이빨이 있었다면 코를  물어 버렸을 텐데.  , 하는 말이 풍선처럼 터졌다. 노아는  장난을 쳤다. 익숙한 목소리와 냄새. 개를 저지하며  옆의 사과를 하나 베어문  노아였다. 집이 떠나가라 짖고 싶었다. 여자가 웃네. 아이도 웃고, 개도 즐거워 보이네. 그렇다면 노아도? 노아가 웃을 때마다 아삭이는 소리가 퍼졌다. 나만 빼고 모두가 즐거웠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과가 되어 버렸으니까. 눈을 감아도 사과의 단내가 났다.

 

 개가 사과를 먹었다. 얄미웠다. 노아는 과도로 사과를 깎으면서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하고 생각을  봤다. 짖을까? 노아를 물어 버릴까? 아니면  개를? 꼬리가 퍼덕이고 땅을 발톱으로 튕기는 생각. 개가 나에게 다가왔다.  . 노아는   된다고만. 자기가 하는 장난은 괜찮고,  장난은  . 나에게 의사를 묻지도 않고  위에 사과나무를 심었지. 기도까지 했지. 다음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고 오래 살라고. 노아는 일요일마다 나를 두고 교회에 갔다. 신실했는데, 노아의 기도는  물렁할까. 과도가 사과의 껍질을 벗겼다. 벗겨진 사과는 나룻배 모양으로 조각이 나서 가지런히 접시 위에 놓였다.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노아가 쥐고 있는 과도가  마음을 사악, 사악 깎아내고 있었다.

 

 빨간 껍질이 벗겨졌다. 아프지는 않았다. 서운했다. 마음이 깎인 다음에는 껍질,  다음에는 과육. 절망의 삼단계. 노아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과도로 나를 깎았다. 물어 버릴 테다. 노아의 기도를 확실하게 무시하고 다시 개로 태어날 테다. 노아의 곁에서 짓궂게 장난칠 테다. 과도처럼 작고 위험한  물어올 테다. 다시는 노아가 장난 같은   치게  테다.  다짐에도 불구하는 노아는 신중하게 과도를 움직였다. 단단히 밀봉된 장난이 풀리고 있었다. 허탈했다. 단정하게 묶인 리본은 노아가 풀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나의 . 예전에는 나의 즐거움이 들어 있었고, 지금은 사과를 먹고 싶다는 노아의 생각이 들어 있다. 속에서 방울이 딸랑거렸다. 아삭.

 

 나는 조각났다. 사과 맛이 나는 나룻배가 되었다. 옆으로 누웠다. 자리가 바뀌었을 뿐이다.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서 그릇 위로. 노아가 사과  조각을 개에게 먹이고 있었다. 아삭거렸다. 나도 아삭거렸다. 아무리 목을 긁어 소리를 내도 아삭거리기만. 스트레스를 받은 과일은  달아지기만.  겉면이 조금씩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배부르다는 소리가 하나둘 나온다. 짓궂은 장난이다. 사과로 태어난 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날카로운 과도로 깎고, 먹지도 않고, 누렇게 변하게 두고. 울음이 치밀었다. 달큰한 냄새가 났다. 접시에 비스듬히 올려진 과도가 선명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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