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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Oct 23. 2021

평등한 어른이 되는 방법

현장에서 배운 교육학 - 결과적 평등





 교육학은 교육심리, 교육철학, 교육사회, 교육과정 등 교육에 관한 다양한 학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해 모든 학문에 ‘교육’을 붙이면 교육학이 된다. 한 아이를 가르치는 데에는 세상 전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믿는다. 너라는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









 두 번째 담임을 맡았을 땐 심기일전하여 3월 첫날을 준비했다. 3월은, 그것도 3월 첫날은 1년의 방향을 합의하는 날이기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선생님을 소개하고 학급 특색 활동을 안내하는 PPT를 만들었다.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선생님의 약속’이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세 개 골라서 궁서체로 적었다. 학생들에게 하는 약속이자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 선생님의 약속

 1. 평등한 담임이 되겠습니다.

 -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더 약한 사람에게 더 힘이 되어주는’ 평등을 실천하겠습니다.

 2. 일관성 있게 규칙을 적용하는 담임이 되겠습니다.

 - 함께 만든 규칙을 존중하여, 친절하지만 단호한 선생님이 되고자 합니다.

 3. 여러분을 믿는 담임이 되겠습니다.

 - 우리 3반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1번은 아이들과 꼭 함께 짚고 싶은 개념이었다. 도윤이 덕분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설문조사를 하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대답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선생님’이다. 수업 실력이나 친근함보다 공정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생들이 많다. 나도 고등학생 때 공부 잘하는 친구 서랍에만 사설 모의고사 문제지를 넣어주는 선생님이 제일 싫었다. 그 문제지를 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기분이 상했다.


 ‘평등한 담임’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무엇이 공평이고 어디까지가 평등인지 자주 혼란스러웠다. 한 반에는 서른 명이 넘는 학생이 있고, 손이 더 가는 학생이 있는 반면 손이 덜 가는 학생이 있다. “선생님,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라며 다정한 말을 건네는 학생과 인용하지도 못할 패드립을 일삼는 학생이 공존한다. 이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건 오히려 평등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평등이란 과연 무엇일까?     





 교육사회학에서는 교육 평등에 대한 개념을 크게 4가지로 구분한다.


 가장 먼저 대두된 ‘허용적 평등관’은 신분, 성, 종교, 인종 등으로 인한 교육 기회의 법적, 제도적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람이 교육받을 권리를 발휘하는 것이 평등이며, 타고난 능력에 맞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다가 능력이 있음에도 돈이 없거나 학교와 거리가 멀어서 능력에 맞는 교육기회를 못 받는 학생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보장적 평등관’은 취학을 가로막는 경제적, 지리적, 사회적 장애를 제거하여 교육받을만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사회경제적 제약 때문에 교육을 못 받는 일이 없도록 교육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교육 평등이라는 관점이다. 


 다음으로 등장한 ‘과정적 평등관’은 학교의 조건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다. 효과적인 학교에 모두 평등하게 취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업성취를 결정하는 학교 도서관, 교과서, 교육과정, 교수 방법, 교사의 능력 등의 차이가 학생들의 학업성취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분석하는 연구가 시행된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콜먼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학교의 시설, 설비, 교육과정, 교사의 유능성 등과 같은 학교 내적 요인보다 부모의 양육 방법, 부모의 사회문화적 자본, 가정 배경, 사회경제적 지위 등과 같은 학교 외적 요인이 학생의 학업성취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 평등관이 힘을 얻는다. 교육의 목적은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므로 결과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 평등이라는 관점이다. 따라서 가정 배경으로 인한 불이익을 사회가 보상하고, 우수한 학생보다 열등한 학생에게 더 좋은 교육 조건을 제공하는 것을 평등의 실현으로 본다.


 방대한 너비의 교육학을 공부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을 꼽으라면 단연코 ‘교육의 목적은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학업성취든 생활지도든 정서적 지원이든 결과적 평등은 어려웠다. 모두에게 똑같이 대하는 것이 차라리 쉬웠다.     





 2학기가 되고, 우리 반 도윤이가 자주 울었다.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다시 그 결과적 평등이 떠올랐다. ‘평등한 담임’이란 단순히 획일적인 태도로 대하는 교사가 아니었다. 기초가 더 필요한 학생에게 보충 수업을 제공하듯 애정이 더 필요한 학생에게 관심을 더 주어야 했다.


 도윤이는 목소리가 크고 장난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 큰 학생에게 장난을 걸었으며 기죽지 않고 맞섰다. 결국 놀림당하고 분을 못 이겨 우는 패턴이 반복됐다. 일종의 세력 싸움이었고 도윤이는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성격이 안 맞는 친구와는 각자 지내면 돼. 선생님은 도윤이가 힘들어 보여서 걱정돼.”


 울고 있는 등을 토닥였지만 다음날이면 도윤이는 또 말을 걸고 또 싸웠다. 상담해보면 제 생각을 조리 있게 풀어내며 “괜찮아요. 그냥 친구끼리 싸우는 거예요.”라고 말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엽서를 쓰기로 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전까지는 반 아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쓴 적은 있어도 딱 한 명에게만 편지를 쓴 적은 없었다. 도윤이 한 명에게만 엽서를 써도 되는 건지 망설여졌지만 ‘기계적 중립’은 중립이 아니라고 되뇌었다. 분명 도윤이는 지금 충분한 인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보랏빛 엽서를 골랐다. 동그란 지구를 바라보는 우주비행사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 엽서였다.     



 도윤아, 도윤이를 보면 우주비행사가 떠올라. 우주는 너무 넓고,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감정들을 발견하며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 이건 내가 아끼는 엽서인데 너에게 주고 싶어. 나는 도윤이에게 소중한 걸 받고 있는 기분이거든. 매일 도윤이가 어떤 이야기를 나눠줄지 기대하며 교실에 들어가. 도윤이다운 도윤이로 자라길 소망할게. 언제나 너를 응원하는 선생님이.     



 일부러 도윤이에게 남아서 책상 줄 맞추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도 없을 때 슬쩍 엽서를 건넸다. 도윤이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신기하게도 다음날부터 도윤이는 울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종업식날 도윤이는 아주 긴 편지를 써왔다. 펼치면 양손을 쭉 뻗어도 모자랄 만큼 길어서 여러 번 접어야 하는 편지였다. ‘고맙습니다’가 스무 번쯤 쓰인 편지를 읽고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앞으로는 ‘한 명에게 쓰는 마음’을 편애라는 납작한 말로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교사는 서른 명의 학생에게 모두 ‘똑같은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헤아리고 그에 맞는 애정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한 번의 눈빛으로 충분하지만 누군가는 두 번의 눈빛이 필요할 수도 있다. 교육이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므로 결과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 평등이라면,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제대로 받아서 모두가 자신이 필요한 만큼의 애정을 충족하는 것 또한 평등이다. 


 우는 아이에겐 엽서를. 그게 바로 내가 평등한 어른이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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