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배운 교육학 - 잠재적 교육과정
교장 선생님께서 신규 교사들만 모아 밥을 사주셨다. 우리 학교는 작은 신설 중학교에 신규만 여섯이다. 9월에 발령받아 동지애를 쌓으며 두 번째 추석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식사는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교장 선생님께선 마지막으로 한 명씩 경력 1년을 채운 소감을 공유하자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런 건가 싶어요. 수많은 아이가 다 예쁘지만 우리 반 애들이 제일 예쁘고, 내 시간에는 떠들어도 좋으니 다른 선생님 시간에는 말 좀 잘 들었으면 좋겠고요. 우리 반 애가 칭찬받으면 기분 좋고 우리 반 애가 혼나면 속상하고 그래요. 건강한 게 최고지만 이왕이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체육도 잘했으면 좋겠고요.
드라마에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잖아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 대사요. ‘교사도 교사가 처음이라서’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처음이라 낯선 게 많고 서툰 제 자신을 자책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점점 더 스스로를 교사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끄덕이던 선생님들께서 몇 마디 보태셨다. 나도 장난처럼 “아휴, 난 저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싶을 때도 있죠~”라며 웃었다. 교장 선생님께선 가만히 들으시다가 말씀하셨다.
“교직이 천성이네.”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교직이 천성이라는 말이, 그 커다랗고 무거운 문장이. 그리고 일주일 전 일화가 층층이 떠오르며 부끄러워졌다.
딱 일주일 전, 우리 반 국어 시간이었다. 1학기 내내 우리 반은 체육대회, 수행평가, 마지막 지필 고사까지 몽땅 고만고만한 성적을 받았다. 아이들에겐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다고 수백 번 강조했지만 남몰래 아쉬운 마음이 싹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업 태도 면에서 칭찬을 많이 받는 반도 아니었다. 선생님들이 모이는 점심시간이면 자연스레 어느 반 분위기가 좋더라, 어느 반이 힘들더라가 주요 이야깃거리인데 아무리 귀를 열어도 우리 반이 등장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나쁜 말 나오지 않는 게 어디냐며 위안 삼았다.
나에게 최고의 반은 아무래도 우리 반이었다. 도대체 왜 화제가 안 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녹초가 되어 쓰러질 것 같다가도 우리 반 수업에 들어가면 웃음이 났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엉성한 발표도, 말도 안 되는 장난도, 공부하는 척하는 몸짓도 모두 귀여웠다.
그날도 수업하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뭉클해서 딴 길로 샜다.
“있잖아, 나는 우리 반이 너~무~ 좋은데, 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난 진짜 우리 반이 최고인데 말이야, 우리 반 칭찬은 나만 하는 것 같아.”
그러자 예지가 해맑게 대꾸했다.
“선생님, 원래 똑같은 걸 보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래요.”
나는 그 말이 웃겨서 장난스럽게 답했다.
“아, 그렇지! 나는 우리 반이 좋아도 다른 선생님들은 다르게 느낄 수 있지~”
한바탕 웃고 수업을 계속했다. 그저 귀엽다고 생각하곤 잊어버렸다. 다음날이었다. 급식실에서 음식을 가득 담은 식판을 내려놓자마자 옆에 앉은 중국어 선생님께서 말을 거셨다.
“요즘 3반 무슨 일 있나요?”
“왜요?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나는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중국어 선생님께선 염려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이셨다.
“아뇨. 오늘 수업 시간에 애들이 담임 선생님께 자기 반 칭찬 좀 해 달라고 해서요.”
나는 직감적으로 어제의 장난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대강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애들이 참 웃기다며 웃고 넘겼다. 그런데 퇴근하고 나서도 다른 선생님께 우리 반 칭찬 좀 해달라고 말했을 아이들의 표정이 두고두고 떠올랐다.
비교하지 않으려고 한다. 각자의 개성과 상황이 있는데 자기만의 잣대로 비교하는 건 나쁜 습관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연중에 나 또한 우리 반과 다른 반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을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날 조회 시간에 능청스레 운을 뗐다.
“너희 어제 중국어 시간에 칭찬받았어?”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어 선생님께서 엄청 칭찬하시던데? 우리 3반이 진짜 잘한다고.”
몇몇 아이들은 “아닌데요?”라며 정직하게 말했고 몇몇 아이들은 “맞아요~!”라며 선생님을 속인 게 기쁜 티를 잔뜩 냈다. 나는 “진짜 그러시던데?”라고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속으로는 이 해맑고 투명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칭찬 같은 거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희는 정말 존재만으로 예쁘다고.
불과 하루 뒤였다. 우리 반 부반장은 공약대로 매일 남아서 청소를 돕고 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쓰레기통 주변을 같이 마무리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문득 부반장이 물었다.
“선생님은 김강우를 왜 김강우라고 불러요?”
“응?”
“선생님은 김강우라고 부르잖아요.”
“김강우를 김강우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몇 번의 문답 끝에야 깨달았다.
“아, 선생님이 다른 애들은 지은아, 혜빈아 이렇게 부르는데 강우만 ‘강우야’라고 부르지 않고 성까지 붙여서 ‘김강우’라고 부른다는 거지?”
“네.”
나는 겸연쩍어져서 “아닌데? 강우라고 부르는데?”라고 말했다. 물론 뜨끔했다.
퇴근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요즘의 생활을 털어놓다가 결국 눈물을 쏟았다. 때로는 영악해도 하릴없이 순진한 아이들은 나를 사랑하는 동시에 별것 아닌 나의 사랑을 관찰하며 눈치 보고 있었다.
강우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아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기 힘든 아이였다.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우리 반에서 가장 빈번하게 이름을 불렀으며, 강우의 보호자는 어느새 내 휴대폰의 자주 통화하는 목록 최상단에 올라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강우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고, 의도치 않게 김강우라고 부르며 나의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름 부르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격이 무던한 우리 반 부반장이 말할 정도니 강우도 알아챘을 것이다. 알아채지 못했더라도 무의식이 느꼈을 것이다. 그게 너무 미안해서 울었다. 속으로 강우의 이름이 입에 붙도록 ‘강우야’라고 여러 번 되뇌었다.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의도적으로 조직된 교과목은 공식적 교육과정, 즉 표면적 교육과정이다. 한편 의도하지 않았지만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은연중에 학생들의 가치관, 태도, 행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 학교 환경과 교육실천 과정이 바로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예를 들어 국어 시간에 배우는 문학 용어는 표면적 교육과정에 해당하지만 “우리 반은 왜 아무도 칭찬을 안 하지?”라는 질문이나 강우에게 유독 성을 붙여 부르는 나의 태도로 아이들이 어떤 감정과 태도를 학습했다면 이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표면적 교육과정은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주로 교과와 관련 있으며 바람직한 내용을 다룬다. 지적인 영역 중심이며 다소 단기적이다. 교과 지식을 전달하는 능력의 원천인 교사의 기능적인 면모에 영향을 받는다. 반면 잠재적 교육과정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학생이 배운 것'으로 주로 학교의 문화와 관련 있으며 바람직한 것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 또한 포함된다. 교사의 언행 등이 학생의 정서, 가치관, 의지 등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솔선수범이 필요하며 정의적 영역을 고려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교육목표를 수립해야 한다. 어렵고 무서운 일이다. 나의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 세밀하면서도 무수한 영향을 미친다는 게 자주 두렵다. 그게 두려워서 출산과 육아에 주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우리 반을 만나며 주변의 초보 부모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을 조금씩 이해해나가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힘들어. 그런데 정말, 정말로, 무엇과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순간들이 있어.”
천성이 부모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천성이 교사인 사람은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엔 늘 간극이 존재한다. 누구나 의식적으로 좋은 엄마,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무의식이 번뜩 언행으로 튀어나오고, 그 찰나로 인한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은 미안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둘씩 알아간다면 어느새 무의식적인 언행을 통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어야만 한다.
예전엔 엄마들이 “엄마가~”라고 운을 떼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나도 어느덧 “선생님이~”라고 운을 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툶마저도 아까운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