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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Oct 24. 2021

선생님, 쟤가 저보고 페미 꺼지래요

현장에서 배운 교육학 - 방어적 수업




 수험생 시절에 두꺼운 이론서를 읽으며 문득 교단을 향한 선택이 두려워진 순간이 생생하다. 바로 교육사회학에서 맥닐의 ‘방어적 수업’을 배울 때였다. 한 명의 교사가 수십 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일대다의 상황에서 교사는 구조적으로 방어의식을 가지고 효율적인 생존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교사의 그 살기 위한 본능이 벌써부터 속수무책으로 공감되었다.


 방어적 수업은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단순화’는 많은 정보를 연결고리나 스토리텔링 없이 단순히 파편적인 목록으로 전달하는 전략이다. ‘신비화’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고 말하며 교사의 정보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생략’은 시사 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를 아예 생략하여 반대 의견을 금지하는 전략이다. ‘방어적 단순화’는 학생의 능력이나 수업에 대한 관심이 부족할 때 간단한 언급만 하고 넘어가면서 이미 이 주제를 다뤘다고 여기게 하는 전략이다. 


 ‘모든 교사는 방어적 수업을 인지하고 성찰해야 한다.’라는 문장에 밑줄 긋던 시절이 까마득할 만큼 실제 교사로서의 삶은 과연 방어적이었다. 다만 가르칠 내용을 충실히 준비하지 않거나 학생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방어적인 게 아니었다. 뜻밖에도 대부분 민원과 관련하여 생존 전략을 펼쳐야만 했다. 민원이란 학생이나 보호자가 교육청에 전화하거나 국민신문고에 글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학교 교무실로 전화 한 통 하는 행위까지 포함된다. ‘어느 교사가 수업 중에 이런 예시를 들었더라, 쉬는 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더라, 학교 밖에서 이런 행동을 하더라’라는 단 한 통의 전화에도 주의를 받는다.


 정치 이슈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헌법 제7조 제2항 때문이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보장된다’라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대부분 당연하게 여기는 이 의무가 시시때때로 갑갑했다. 우리의 의식주, 생활, 신념, 소비와 활동 등 모든 영역에서 정치가 아닌 것은 없다.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논의조차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정의가 우선되어야 하므로 당연히 정치와 연결된다. 그런데도 교사는 학교 안에서 정치적 언동을 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학생이 없는 곳에서도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 한껏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교육부는 교육부 정책 이야기를 전하는 웹진 <행복한 교육>에서 ‘교사의 정치적 발언과 태도, 어디까지 허용되나요?’라는 사회과 교사의 질문을 실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대법원판결(2012년 4월)이 준거가 된다며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비단 교육현장에서뿐만 아니라 교육현장 외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특히 아직 독자적인 세계관이나 정치관이 형성되어 있지 아니하고 감수성과 모방성, 그리고 수용성이 왕성한 미성년자들을 교육하는 초‧중등학교 교원의 활동은 그것이 교육현장 외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에게 직접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초‧중등학교의 교원은 교육현장 외에서의 활동도 잠재적 교육과정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20년 4월, 헌법재판소는 정당이 아닌 ‘그 밖의 정치단체’ 활동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의 조항은 명확하지 않으므로 헌법에 위배된다며 위헌을 결정했다. 하지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교사의 교육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당 가입과 집회‧시위 참여를 금지한 정당법과 국가공무원법 조항은 합헌을 선고했다.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실시하는 교육과정 이외의 활동인 창의적 체험활동 목록에 분명 양성평등교육(아쉽지만 아직 ‘성평등교육’이 아니라 ‘양성평등교육’이다), 평화통일교육(젊은 세대로 갈수록 통일이 더 이상 민족적‧당위적 의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시작된 교육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등이 있다. 현장의 교사는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단순화와 생략을 적절히 활용한다. 통일부와 교육부가 발표한 ‘2020년 학교통일교육 실태조사’ 결과 현장 교사들은 학교 통일 교육을 시행하는 데 어려운 점으로 36.3%가 민원 발생에 대한 걱정을 꼽았다.


 광주의 한 중학교 도덕 교사가 전통적인 성 역할을 뒤집은 미러링 기법으로 성불평등을 다룬 프랑스 단편 영화 <억압받는 다수>를 상영했다가 일부 학부모 민원으로 경찰과 검찰 수사를 잇달아 받은 것이 2019년이다. 고발된 정서적 학대 죄목에 대하여 ‘혐의 없음’으로 모두 불기소 처분을 받았지만 광주광역시교육청징계위원회는 정직 3개월 징계를 의결했다. 학생의 불쾌감을 최우선으로 여긴 것이다. 이에 대해 해당 교사는 ‘불편함이야말로 배움의 시작이다. 불편함이 없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정보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2021년에는 서울교육청은 성소수자, 노동인권 의무교육이 포함된 학생인권계획을 발표했다가 교육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며 헌법소원 소송이 제기되었다. ‘젠더 이데올로기와 편향된 사상을 주입하는 학생인권종합계획을 반대한다’는 청원이 교육감 답변 요건(1만명 이상)을 넘긴 3만 3천여 명의 동의를 달성했다. 이런 현실이 자꾸 교사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나는 분란은 일으키기 싫었다. 내가 숨길 수 있는 나의 면모와 숨길 수 없는 면모, 그리고 숨기고 싶지 않은 면모를 헤아렸다. 특히 “선생님, 페미니스트예요?”라는 질문은 시뮬레이션까지 해가며 반응과 대답까지 단단히 준비했다. 자칫하면 민원의 소지가 되고 운 나쁘면 매스컴에까지 뜰 수 있는 그 질문이 닥치면 나는 눈을 마주치며 여유롭게 반문할 것이었다.


 “그게 궁금했구나. 너는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아이의 생각을 귀 기울여 들어야지. 아이의 의견을 먼저 충분히 말하게 한 후 그 끄트머리에서 가만히 나의 의견을 덧붙여야지.



 “선생님은 페미니스트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너희가 ‘여자라서’ 또는 ‘남자라서’의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길 바라.”



 나아가 여력이 된다면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각호했던 순간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시험을 일주일 앞둔 국어 시간이었다. 한창 시험 범위를 마무리하기 바쁜 시기인데도 아이들의 장난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창가 뒤쪽에 앉은 유경이와 현우가 서로를 쿡쿡 찌르기에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다. 다시 반복되는 장난에 다가갔더니 유경이가 억울한 목소리로 일렀다.



 “선생님! 쟤가 저보고 페미 꺼지래요!”



 분명 나는 이 당황스러운 때를 대비하여 만만의 대비를 해두었다. 계획대로만 하면 되었다. 나는 질문하고, 학생은 대답하고, 학생이 자신이 내뱉은 말을 통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완벽했다.


 별안간 메갈 쿵쾅쿵쾅이라는 쪽지나 여자는 군대 안 간다고 억울해하던 쑥덕거림이 떠올랐다. 다이어트한다고 급식을 안 먹거나 화장을 안 했다고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여학생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조선 시대 문학 작품을 배우며 여성차별을 지적하고 현대 사회와 비교해보자고 물으면 성별 구분 없이 손을 들고 “현대 사회에는 성차별이 없습니다.”라고 발표하던 거침없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 모든 현상과 질문에 하나씩 답하고 차례로 알아가는 과정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학교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가 악의적 공격과 민원에 시달리고 ‘왜곡된 성교육으로 아동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했다’라며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한 사건까지 스쳐 지나갔다. 


 교실은 조용했다.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진도가 촉박한 교과서가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엄중하게 말했다. 



 “자자, 조용히 하자. 그리고 그런 얘기는 사회 시간에 하세요.”



 아……. 등딱지 안으로 숨어든 거북이가 된 것 같았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좌절감이 덮쳤다.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하는 직업인 만큼 교단의 무게가 무거워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무게에 지레 겁먹는 교사는 지레 겁먹는 학생을 만들 뿐이다. 내가 밑줄 그었던 '모든 교사는 방어적 수업을 인지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문장은 틀렸다. 교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성찰해야 한다. 도망치지 않는 수업을 만들 방안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서른 명 앞에 서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 서른 명이 나를 어른으로 알고 있을 땐 더욱더 어렵다. 나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 비판받고 싶지 않아서, 때로는 모호한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아이들이 넘어올 수 없는 선을 긋는다.


 방어적 수업에서의 해방을 위해선 당황스러운 각종 질문에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어른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는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나 자신을 낮춰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만들 이야기는 분명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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