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차 Oct 24. 2021

사과할 수 없는 잘못

현장에서 배운 교육학 - 실존주의 교육철학





 대학 문학 시간에 실존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가 생생하다. 나이 지긋하신 교수님은 칠판에 특유의 근사한 글씨로 커다랗게 판서하셨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사물과 다르게 본질이 규정되지 않고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라는 그 모호한 문장이 잊히지 않는다. 인간은 무(無)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과 운명을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본질을 창조해나간다는 그 울림이 선명하다.


 교육철학의 다양한 사조 중 가장 매료된 것도 실존주의 교육철학이었다. 실존주의 교육철학에서 교육의 목적은 학생이 자유의사에 따른 판단으로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교육 방식으로는 ‘만남’을 제시한다. ‘만남’은 ‘교육’에 선행하며, 교사는 학생을 인격체로 대우하고, 학생의 주체성을 격려하며 ‘나-너’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덧붙여 죽음, 좌절, 공포, 갈등과 같은 인간 삶의 어두운 면도 보여주는 진솔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적극적인 삶의 의미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철학이지만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교사란 모름지기 이상을 추구하고 낙관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다짐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르고 달래고 괜찮다며 토닥이고 때로는 진지하게 혼을 낸다. 나와 엇비슷한 키의 아이들은 천방지축으로 장난치다가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면 그제야 눈치를 보고 변명하기 급급하다. 그때도 위계를 지닌 관계가 아니라 ‘나-너’로 만나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에게 선택과 책임을 강조했다. 



 “선생님이 늘 말하는 게 있지? 거짓말이 가장 나빠. 거짓말을 하면 신뢰가 깨지기 때문이야. 한 번 깨진 신뢰는 회복하기 힘들어.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잘못을 해. 그럴 수 있어. 다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 실수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중요한 거야.”



 학교는 교과 지식뿐만 아니라 삶을 사는 법, 특히 함께 사는 법을 익히는 곳이다. 이 세상 어느 인간도 단연코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인 우리는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다는 것,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하고 책임을 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꼭 배우길 바랐다.


 그러나 정말로 모든 실수와 잘못이 괜찮을까? 학생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진다면 마무리된 걸까? 책임을 졌다는 건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교직 생활 1년 만에 의문이 들었다.      





 금요일 오후 마지막 교시는 우리 반 수업이다. 여러 차시에 걸쳐 <흥부전>을 비틀어 자신만의 소설로 재구성하는 중이었다. 지난 시간엔 인물을 설정했고 이번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구상하는 활동지를 나누어주었다. 


 그때였다. 뒷자리에서 물고기가 어쩌고저쩌고 투닥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나는 킬킬대는 쪽으로 다가갔다. 눈높이를 맞춰 앉곤 장난에 끼어들 듯 가볍게 질문했다.



 “뭔데? 무슨 일이야?”



 아이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웃었고 한 아이가 입을 뗐다.



 “우석이가 미술실 어항에서 물고기를 몰래 가져왔는데요, 그걸 뺏어서 애들이랑 장난치다가 죽었어요.”



 ‘죽었다’라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얼굴이 굳어버렸다. 언급된 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학생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김우석.”



 이름 부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아무리 심각해도 ‘우리’를 빼먹지 않고 ‘우리 우석이’라고 불러왔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성까지 붙여서 단호하게 호명했다. 순식간에 교실이 조용해졌다. 평소와 별다른 것 없는 장난이라고 여겼던 아이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건 형광등을 깨거나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것과 달랐다. 몇몇 학생을 통해 간략히 상황 파악을 하고 두 학생에게 종이 한 장씩 나눠주었다. 해당 학생은 변명하려는 듯 입을 뗐지만 나는 엄격하게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이었는지 처음부터 쓰세요.”



 그렇게 받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미술실에서 우석이가 어항에서 튀어나온 물고기를 주워서 통에 담아왔습니다. 저는 그 통을 뺏어서 물고기를 손에 쥐고 여자애들 앞에 들이대며 장난을 쳤습니다. 우석이가 물고기를 다시 가져가서 안 주려고 하길래 뺏으려고 하다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손으로 주워서 화장실 세면대에 넣고 물을 틀었는데 뜨거운 물이 나왔습니다. 친구들이 물고기가 파닥이는 것을 구경하면서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움직이지 않자 죽은 것 같다고 하길래 꺼내왔습니다. 옆에서 친구들이 웃으니까 저도 모르게 신이 났습니다. 물고기를 밟으라고 했고 시체를 훼손했습니다. 납작하게 되는지 보려고 쓰레기통으로 눌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지러웠다. 슬픔과 분노와 배신감과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얽히고설키며 거북하게 치밀어올랐다. 교탁에 섰다. 새삼 거리감이 느껴졌다. 한 명 한 명이 낯설었다. 내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일부러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누군가는 물고기의 죽음에 슬퍼한다는 걸, 생명을 담보로 건 장난에 분노한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다.


 마침 며칠 전에 담배로 걸린 학생들이었다. 그때는 엄한 척을 했다면 지금은 정말로 엄해야만 했다. 천천히 단어를 골라 힘을 주어 말했다.



 “여러분이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우든 호기심에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본인 몸에 해로운 거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시도해볼 수 있고 경험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생명을 장난으로 죽이는 것, 나는 손가락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프면서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고통을 즐기는 것, 자신이 돋보이려고 다른 존재의 몸이나 마음에 상처 입히는 것, 그건 정말 나쁘다고 생각해요. 정말 진심으로 매우 나쁘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은 기쁘고 설레고 신나고 화나고 무섭고 짜증 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죠? 타인이 여러분의 감정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기분 나쁘고 억울하죠? 다른 사람도, 동물도, 물고기도 마찬가지예요. 나 자신도, 옆에 있는 친한 친구도, 대화를 한 번도 안 해본 친구도, 앞에 있는 선생님도, 방금 죽은 물고기도 모두 감정이 있어요.


 그리고 나와 다른 존재의 감정을 느끼는 것, 그래서 존중해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공감 능력이에요. 물고기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고통받는 존재 곁에서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조용해진 교실에서 잠시 침묵했다. 전체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옆에서 보고만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한다고 했죠?”


 “방관자요.”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커다랗게 울렸다.



 “응, 내가 좋아하는 여러분이 어느 자리든 방관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코끝이 터질 것 같았다. 뒤돌아섰다. 작은 물고기가, 물고기를 둘러싼 장난이, 웃음소리가, 신발이, 쓰레기통이, 옆에서 웃음 짓는 아이들이, 소란스러움이 제멋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교실은 여태껏 없던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 교실 문밖으로 나갔다. 심호흡하고 감정을 추스른 후 들어왔다. 웅성거리던 아이들은 내가 들어서자 다시 조용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긴 정적이었다. 장난을 쳤던 우석이가 손을 들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이는 무거운 분위기를 가까스로 깨며 말했다.



 “선생님, 기말고사 며칠 남았어요?”



 평소엔 교과서도 깜빡하기 일쑤면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일부러 묻는 의도가 빤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설아야, 오늘 디데이 몇이지?”



 아이들은 부드러워진 나의 목소리에 안심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선생님, 38일 남았어요!”


 “우와, 시간 빠르다!”


 “헉, 벌써 38일 남았어?”


 “하아, 어떡하냐.”



 우석이는 다 들리도록 “아, 이제부터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들의 노력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소란도 잠시,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무거운 정적을 그대로 두었다.


 교실 한 켠에서 성진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곤 성진이 쪽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실례되는 질문을 해도 될까요?”



 나는 여전히 꾹 닫힌 마음을 풀지 못한 채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뭔데?”


 “실례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실례가 될 것 같은데요, 저…….”


 “응, 말해봐.”


 “제 소설에서 제비가 죽는데요, 괜찮을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커다란 남학생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을 찾다가 되물었다.



 “잔인하게 죽어?”


 “많이 잔인하지는 않고요. 아닌가, 잔인한가? 흥부를 위해 싸우다가 칼에 맞아서 죽는데요.”


 “음, 죽는 데에도 이유가 있으면 괜찮겠지? 현실에선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많지만 소설 속에선 이유가 있어서 사건이 벌어지거든. 그래서 소설이 재미있는 거야. 이유도 모른 채 사건만 일어나면 답답하잖아.”



 자신의 소설에서 삶이 꺼지는 생명을 걱정하는 마음이 아득했다. 굳건하던 철벽이 어쩔 수 없이 녹아내렸다. 저기선 또 다른 학생이 커다랗게 혼잣말을 했다.



 “아, 내 소설에서도 제비가 죽는데. 제비를 땅에 묻어줘야겠다.”



 결국 이런 순간들 때문에 아이들을 미워하지 못한다. 웃을 수밖에 없다. 내가 웃자 아이들도 이유 없이 따라 웃었다.


 수업이 끝나기 5분 전, 해당 학생 두 명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번 시간 끝나면 미술 선생님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고, 사과드리고 와.”



 종이 치고 아이들은 “지금 다녀올게요.”라고 말하더니 청소 시간이 끝날 무렵 뛰듯이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는데 표정은 들떠있었다.



 “선생님, 미술 선생님이 괜찮대요. 어차피 날씨가 추워져서 오늘내일 죽을 것 같았대요. 그래도 무슨 일 있었는지 다 말씀드렸고요,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괜찮다고 하셨어요.”



 나는 눈치를 보는 이 어린 마음이 그새 안쓰러워졌다.



 “응, 그래도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 애썼어.”



 여학생들은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들어와 “선생님, 힘내세요!”라며 나를 한 번씩 안았다. 옆에서 쭈뼛쭈뼛 서 있는 남학생들은 “선생님, 제가 힘내라고 하진 못하겠지만요, 저 수행평가 준비를 열심히 해올게요.”라고 말했다. 인과관계가 이상한 위로에 큰 소리로 웃었다. 진심이었고,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집에 도착해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면 안 되었다. 장난친 아이들을 마지막에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었다. 한 번 더 방과 후에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시간을 들여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다.



 “선생님이 항상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지? 그런데 있잖아, 이 세상엔 사과할 수 없는 잘못도 있어.


 너희가 잘못한 대상은 몰래 물고기를 훔친 미술 선생님만이 아니야. 고통받은 물고기에게도 사과해야 해. 그런데 물고기는 이제 이 세상에 없잖아. 이미 죽을 운명인 건 상관없는 일이야. 편하게 숨을 쉬며 죽는 거랑 칼에 스무 번 찔려서 죽는 거랑 다르잖아. 심지어 사체라 하더라도 난도질하고 훼손하는 건 나쁜 거잖아.


 사과한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게 아니야.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끝이 나는 거야. 그런데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상대가 더는 살아있지 않으면, 상대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면, 그건 사과할 수 없는 잘못인 거야.”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배워야 한다. 책임의 무게를 알려주는 것이 교사의 일 중 하나다. 이에 분명 동의하지만 으스러진 작은 물고기의 시체 앞에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실존주의는 획일적으로 요구되는 선험적인 도덕성을 비판한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선택하고 책임지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그렇게 개인은 자기만의 진리의 주체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명이 죽는다면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특히 물고기의 죽음처럼 누구도 책임의 크기를 따지지 않는 문제 앞에선 더욱 막막해진다. 어떤 기준으로 잘못의 크기를 판단할 수 있을까? 피해받은 존재가 아닌 다른 권위자로부터 책임의 무게를 면제받아도 책임을 다한 걸까? 이 세상에는 어떻게 해도 책임질 수 없는 행동도 있다. 그럴 때는 과연 어떻게 대가를 치를 수 있을까?


 실존주의 철학은 하나의 정답도 정해진 방향도 거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정답을 찾고 싶어진다.







이전 04화 선생님, 쟤가 저보고 페미 꺼지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