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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Aug 24. 2022

신고

내 인생의 가장 선명한 사건

나는 중학교  아빠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날 저녁은 아빠와 통화가 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새벽 즈음 집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기에 나는 그가 얼른 귀가했으면 했다. 그의 컬러링은 가수 ‘  생에 봄날은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는데, 나는  노래에서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는 것을   정도 반복했다. 스무 통이 넘도록 연락이  됐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각성 상태로 선잠에 들었다. 새벽 무렵이었을 것이다. 현관문에서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아빠였다. 온몸을 부딪혀 문을 열려고 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문장으로 정돈된 말이 아니었기에 마치 한 마리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엄마는 모른 체 누워 있었다. 도저히 잘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엄마는 모른 체 가만있었다.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혈류가 지나치게 돌아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문을 여는 것, 문을 열지 않는 것.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내게 감당할 수 없을 후폭풍이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엄마를 깨우고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했다.


“하지 말자.”


내 목소리는 초조로 인해 떨리고, 다급했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하지 말자.”


엄마는 말렸다. 왜?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무작정 1, 1, 2를 눌렀다. 전화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울음이 터졌다. 아빠가 술 먹고 쳐들어 오려고 해요. 너무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경찰은 짜증을 내며 어른을 바꾸라고 했다. 엄마가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알렸다. 곧바로 출동하겠다는 말이 들리고, 동시에 현관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강해졌다.


신고 이후, 현관 밖에서는 입에 담기도 힘든 욕지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빠는 아파트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불로 기어들어가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가능하다면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주차장 쪽에서 경찰차 소리가 짧게 울렸다. 곧 우리 층에서 무전기 소리와 함께 아빠를 연행하는 소리가 들렸다. 놓으라며 반항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엘리베이터가 닫힘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었고 다시 잠을 자러 갔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디 가서 떠들 만한 영웅담은 아니었다. 신기한 체험이랍시며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빠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태연하고 상황을 회피하려는 엄마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모든 감정은 힘을 잃었다. 그리곤 또다시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무력해졌다. 그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던 나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나의 가정사를 ‘수치스러운 것’ 혹은 ‘인생의 기구함’ 정도로 받아들이고 숨기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최악의 인물들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고, 얼마 동안은 그 영향력 아래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잠잠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아물지 않았다.


1년 뒤부터 우울증이 왔다. 건물 옥상을 보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차도가 보이면 달려들고 싶었다. 상담 직종에 근무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곧바로 정신과 진료와 심리상담을 병행해야 하는 위급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심각한지도 몰랐고, 우울증이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다. 다만 나는 거지 같은 가족들 아래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우울감에 도저히 일상생활이 되지 않자, 친구와 시내의 정신과에 방문했다. 가는 버스 안에서 계속 죽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정신과 문을 열고 소파에 앉았다. 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기다렸다. 갑자기 의사가 나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당혹감에 가까웠다.


“부모님 동의가 없으면 진료하기가 어려워요. 부모님이랑 같이 오세요.”


진료할 수 없다는 ‘거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과 함께 올 수 없었다. 엄마는 새벽에 일했고, 낮에는 잠만 잤다. 아빠는 신고가 들어간 이후 친할머니 집에 기거하며 연락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내가 많이 힘드니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우리 집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고, 엄마는 나와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보호받거나 지지받지 못한 상태로 자라고 있었다.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힘든 상태로 말이다.


어느 날, 수업에서 ‘효도’라는 주제가 나왔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반발심이 들었다. 내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내가 부모에게 잘해야 하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문장 안에는 부모님이 자식에게 사랑을 의도로 하는 행위를 하기에 고마움을 표해야 마땅하다는 전제가 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의식주 외에 받은 것이 없었고, 의식주에 대해서도 한 치의 고마움이 없었다. 나는 수업에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욕을 하고, 방치하고, 미워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수업은 화기애애했고, 당연한 것을 가르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교실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친할머니 장례식에 갔다. 그때 아빠를 다시 보았다. 고모도 있었다. 나는 할 줄도 모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칼을 잡고 야채를 썰었다. 고모가 계속 내 앞으로 야채를 가져다주었고, 손질이 다 된 야채는 가져갔다. 나는 목구멍까지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신고했었어요. 경찰에. 술을 많이 먹고 와서 현관문을 두드리고… 힘들게 해서…”


고모는 가만히 듣다가 한마디 했다.


“너는.. 아빠를 경찰에 신고하면 어떡하니?”


정신과에 이어서 나는 또다시 거절당했다고 느꼈다. 고모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잠시 인상을 쓸 뿐 야채 손질을 계속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일까? 나는 막 눈물이 났다. 집에 도착해서는 친할머니 장례식에 왜 갔느냐고 엄마에게 혼이 났다.


“할머니가 나한테 홍삼 젤리를 줬어. 공주라고 불러 줬어.”


그래서 갔어. 그래서 갔단 말이야. 울면서 말해도 엄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인지,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슬픈 것이 더 커서 나는 그냥 울었다.


지금은 내가 유년시절에 했던 선택이 모두 옳았다는 것을 안다. 대학생이 되어 무수한 상담을 받고, 상담을 공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형태만 갖추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가정이라고 부를 수 없고, 서류에 역할상 명시만으로는 부모라고 부를 수 없다. 온전히, 본연의 역할을 다해야 가정이라고, 부모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부모가 아니었다. 때문에 중학생 때의 그 차가운 새벽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망설임 없이 아빠를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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