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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Aug 24. 2022

수묵화가 그려진 수영복

며칠 , 처음 수영을 배울  샀던 수영복을 찾았다.  모양이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는데, 채도나 명암은 낮아서 마치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무늬였다. 게다가 반팔 티처럼 어깨 노출을 최소화하고, 허벅지를 가려주는 3 바지 형태였다. 나는  수영복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누가 봐도  몸을 보이는 것에 잔뜩 경계심을 갖춘 자의 수영복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초보의 수영복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영을 처음 배웠다. 공부에 딱히 흥미가 없던 나는 수업시간보다는 점심시간에 활기가 도는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반항적이진 않아서 야간 자율학습은 꼬박꼬박 참여했다. 그 속에서 물론 재미있는 순간들이 정말 많았지만 나는 어느 틈엔가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수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꽤나 충동성이 높던 나는 그 생각이 들자 집 주변의 수영장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성수기였던 7월 즈음이었던 지라 시나 구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은 자리가 다 차고 없었다. 결국 나는 우리 집에서 편도 2시간이 걸리는 영도에서 수영을 다니게 되었다.


가자마자 현란한 자유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나는 한 달 동안 물에서 숨 쉬는 방법을 배우고, 흰색 기포가 나올 때까지 발차기만 했다. 게다가 강사님은 처음 배우는 초심자 레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수경을 쓰고 물속에 들어가 코로 숨을 쉰 뒤 다시 수면 위로 나왔다. 강사님은 ‘음파 음파’ 소리를 무한 반복하라고 했다.


25m 레인에서 나는 단 5m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강사님이 가르쳐 준 자세대로 킥판을 잡고 나아가려고 하면 되려 후진을 했다. 어라, 수영에서 후진을 하는 영법은 보지 못했는데. 이상하다. 부끄러웠지만, 우리 레인에 있는 사람들 모두 비슷한 실력이라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자, 회원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손을 자연스럽게 피셔야 해요.”


무수한 피드백을 받았는데, 입을 열면 물이 들어가므로 고개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의견 있어요’ 자세로 손바닥을 꼿꼿이 든 채 자유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거기서 나는 수영을 처음 배우는 입장이었고, 내 모든 자세는 지적과 피드백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 배운다는 것에 설렘보다 불안과 마음의 동요가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수영장으로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영 가방을 챙겨서 동삼동의 수영장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땀을 흘리며 올라야 했지만 말이다.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은 왜 그렇게 먼 곳까지 가냐고, 굳이 가야 하냐며 나를 말렸다. 수영은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고 하루 네 시간을 소비해 수영을 계속했다.


나는 그때의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 나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바뀔 것 같지 않는 늪처럼 느껴지는 이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수영은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벗어나 허리가 아플 정도로 버스를 오래 타고, 미적지근한 수영장에 들어가 진척이 없는 것 같은 연습을 한 후, 피곤에 절어 잠만 자다 집에 도착하는 그 일상은 내게 새로운 것들이었다. 어떤 무거움을 얼굴에 드러낸 채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덜컹이는 것은 소속감이 들게 했다. 진척이 없는 연습이더라도 나는 물에 들어가는 순간 물이 부글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서 좋았다. 피곤에 절어 비몽사몽한 모습으로 서둘러 정류장에 내리는 것은 오늘도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효능감이 되었다.


수묵화가 그려진 수영복은 엉덩이 부분이 마구 헤져 있다. 발차기 연습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초보 때라서 수영복이 하나뿐이니 단벌신사로 다녔기 때문이다. 또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풀이 그려진 부분들도 드문드문 얼룩이 져있다. 하지만 스스로 탈출구를 찾아 행동했던 그때가 떠오르기에 이 수영복은 각별하다. 언제든, 연약해질 때면 이 수영복을 찾아봐야겠다. 넌 했어, 그러니까 또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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