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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이 Sep 03. 2022

고양이 뒤집어보기

한때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길에서 잠든 그 아이가 너무나 평온해 보였기 때문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밥만 먹는 일만 하고 싶다는 푸념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다. 그 생각 이후로, 길을 다닐 때 고양이가 전보다 잘 보였다. 관찰 결과, 고양이들은 생각보다 여유롭고 평온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하고, 도망치는 쪽에 가까웠다. 이 발견은 단순히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았다. 바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관통하고 있는 발견이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평면도처럼 납작하게 바라볼 수 없다. 모든 것은 동전처럼 드러나는 쪽이 있으면 감추어진 쪽도 있다. 제과로 비유하자면 패스츄리에 가깝달까. 한 겹 한 겹이 모두 다르고, 구별된다. 패스츄리를 가르면 또 다른 겹이 나타나듯, 세상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모든 것들을 손쉽게 판단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테다. 딱 떨어지는 구구단처럼 이건 이거, 저건 저거, 이건 이래서 이래, 저건 저래서 저래, 그렇게 한다. 죄책감도 별로 느끼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일이 있다. 기사를 읽다가,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진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다. 댓글은 ‘작은 시험 하나 떨어진 거 갖고 자살까지 하냐’는 맥락의 비난이 무수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어떤 기질과 환경에서 자랐는지, 운전면허 시험에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과락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기사가 주는 정보는 ‘시험에 과락해서 자살했다.’는 고작 한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멋대로 비난하고, 멋대로 안타까워하고, 멋대로 훈계를 했다.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져서 자살을 했다는 동전의 단면에만 집중한 것이다. 이면에 담겨 있을 고인의 삶과 역사는 살피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함부로.


이쯤 생각이 뻗어가니, 더이상 나는 고양이를 ‘평온하게 잠만 잔다. 부럽다.’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다. 평온함은 단면뿐이며, 그 이면에는 경계하고 도망치며 삶을 영위하려는 빠듯한 달음박질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어제는 자동차 보닛에 최대한으로 몸을 늘여 숙면에 빠진 고양이를 보았다. 부러운 마음에 ‘부…’까지 입 밖으로 나왔지만 도로 삼켰다. 저 고양이를 동전처럼 뒤집으면 분명히 나름의 고충이 있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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