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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pr 29. 2021

아몬드 책- 손원평

다른 소수를 위한 다수의 배려가 있는 세상을 꿈꾸며

손원평 작가의 2017년 발표작 아몬드.

무표정한 소년의 얼굴 옆에 책 제목이 작은 세로글씨로 쓰여있는 표지가 인상적인 소설로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나 낯익은 표지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최근 몇 년간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책에 대한 호기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궁금해서라도 사서 읽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기에 주문하여 읽었다. 그리고 단 두어 시간 만에 읽을 정도로 재미있기도 하고 무언가 생각이 가슴속에 뒤엉키는 것이 흡입력이 강한 소설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선천적으로 타인들과 다름으로 인해 힘듦을 타고난 사람이 후천적으로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하는 치유기...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송원평님

주인공 윤재는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정상인의 1/3 크기로 태어났다. 그로 인해 각성 수준이 낮은 대뇌 피질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장애 아닌 장애를 안고 사는 경우로 우리는 이런 성향의 사람을 가리켜 사이코패스라 한다. 한마디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는 것을 정상인과 비정상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 것이 불과 200년 남짓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리가 맹신하는 이성(理性)이라는 매우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판단 기준으로 생각을 하며 살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성을 우리의 뇌리의 깊게 박은 인물이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 이전엔 정상인, 비정상인의 이분법적 분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저 조금 다른 사람으로 돌봐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가치판단 기준이 이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나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비이성적 인간에겐 광기(狂氣)라는 멍에를 씌우기 시작했다.

여기 주인공 윤재는 태어나면서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광기의 어두운 빛을 두리 우고 태어났다.(아니나 다를까 친구들은 감정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윤재를 미X새끼라고 의례적으로 부른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조금 들여다보자.

이성(理性)을 벗어나면 비정상인으로 광기의 어둠이 드리우게 된다. 인간의 특질을 이성으로 설명한 독일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윤재는 홀어머니 밑에서 번듯하게 대학을 나와 남부럽지 않게 살 것을 원하는 가정에서 성장한 이를 엄마로 두고 태어났다. 그런 엄마는 할머니의 기대대로 서울에 있는 번듯한 여자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나 학교 앞 싸구려 액세서리 노점상과 사랑을 하게 되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이는 미혼모에게서 유복자로 태어나게 된다.


그런 딸과 할머니는 6년 후 재회하여 함께 살게 되고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고민이 있다면 선천적으로 편도체가 작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늘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아들과 손자였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남들과 어울려 살수 있게 갖가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감정 대처법을 연습시키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는 법 감정 표현에 서투른 윤재는 늘 학교에서 놀림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3학년 생일날 시내로 외식을 갔다가 반사회적 부랑아에게 묻지 마 칼부림 공격을 당하고 할머니는 그 자리서 즉사하고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한순간에 가정까지 파괴되어 고아가 되고 말았다.

이제 윤재는 이 거친 세상을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어머니의 헌책방 건물 주였던 2층 빵집 사장인 심 박사(그 역시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는데 유능한 심장전문의였던 그는 일에 중독되어 살다 아내가 병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여행지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경험을 하고 아내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빵이 좋아 빵을 만들어 팔며 살아간다)의 도움과 할머니의 보험금으로 그럭저럭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중 윤 교수라는 정 박사의 친구가 찾아와 자신은 오래전 아들을 잃어버리고 아내와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왔는데 아내는 이내 병에 걸려 지금 시한부 인생의 막바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꿈에 그리던 아들을 찾았지만 지금 아내를 만날 상황이 안되기에 아들과 닮은 윤재가 죽어가는 아내를 만나 아들 대역을 해줄 것을 부탁하자 윤재는 받아들이고 그의 청대로 행해준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불량해 보이는 전학생이 오는데 그가 바로 자신이 연기한 윤 교수의 아들 곤이었다.

미아가 되어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거칠게 살아온 곤이와 대립하기도 하지만 이내 서로의 상처를 어느 정도 보듬는 친구가 된다. 윤재는 선천적으로 곤이는 후천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이었다.

둘은 많이 다르지만 그 다름을 보다듬을 수 있는 포용력이 있었기에 많은 어려움을 뒤로하고 진정한 우정을 쌓게 되고 윤재의 어머니도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하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창작과 비평사의 청소년문학 응모전에 입상한 작품으로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은 윤재와 곤이는 자신의 두아들의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작가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두 아들의 이름이 주인공들의 이름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소설 속 어린 두 주인공이 실재 존재하는 마음 따뜻한 이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들이 작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사랑으로 우러나온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에 뭉쳐진 그 아릿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대다수의 우리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가슴 따뜻하게 보다듬어주지 못하고 그들끼리 상처를 치유해 주는 불편한 가정(假定)이었다.


픽션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논픽션 같은 이야기가 이 '아몬드'가 아닐까 싶다.

지금 이시대 주류 철학을 해체주의라고 한다.

현대철학에서 수단화된 인간보단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는 실존적 철학이 나타났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인류 모두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해체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쉽게 말하면 소외받는 소수도 같은 인간으로 그들의 삶도 존중받아야 하며 그들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도 인정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나 철학과 실제의 삶은 다르다. 점진적으로 좋아진다 하더라도 그간의 고통받는 소수에 대한 상처를 누가 치유해 줄 것인가? 상처받은 사람들만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수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답답한 현실에 대한 물음들로 가슴 답답하고 아린 것들이 내게 밀려왔다.

두 아들의 어머니 손원평 작가도 두 아들이 그런 소수를 누구나 다 다독일 수 있는 아량이 넘치는 사회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소설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슴 따뜻하지만 그 따뜻함이 현실에는 부재(不在) 한다는 공허함을 느끼게 하는 소설 '아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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