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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pr 22. 2021

서정주- 국화 옆에서

소임을 다한 것이 아름다우며 그렇기에 말라죽을 겨울도두렵지 않다

서정주 시인은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대한민국 부통령이자 동아일보 창간자인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또 다른 대표 시 '자화상'에 자신의 아버지(시에서는 애비라는 표현을 씀)는 종이 었다고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자신의 출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마름이라는 것이 종이나 머슴이라기보다는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자였기에 종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젊은 삶을 좀 더 치열하게 되돌아보는 시적 표현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아무튼 대한민국 문학사의 큰 족적을 남긴 시인이지만 일제에 부역하는 시를 쓰고 그 후 이 나라에 들어선 군사정권을 찬양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삶을 살고 간 이가 시인 서정주이다.

그런 서정주 시인의 작품 중 최고로 꼽히는 '국화 옆에서'를 감상해 보자.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956년 서정주 시선 中 


사실 서정주 시인의 시를 그 삶과 떨어져 놓고 보면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서정시의 대부이자 천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만든 삶의 멍에가 있기에 그 멍에를 살펴보고 시를 감상하자면 정말 요즘 말로 입맛 떨어지는 게 그의 삶이었다.

서정주 시인과 동시대에 태어났던 문인들이 격동의 시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짧은 삶에 한, 두 권의 책을 낸 것(윤동주, 정지용, 김소월, 이육사, 이상 등 항일. 친일을 떠나서 그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기에 감수성 짙은 시인들에게는 공장폐수에 버려진 관상어 처지였을 것이다)에 비하여 그는 확실히 천수를 누리며 다작(多作)을 했다. 물론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에 그렇게 활동할 수 있었다지만 그 환란의 시대에 평생을 대학교수, 언론인 등으로 사회 지도층적 지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부귀를 누렸다.

그 부귀 뒤에는 사후(死後)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을 자신의 이름 석 자 옆에 확실히 남겼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말한 '그땐 광복이 될 줄 몰랐으니깐'이라는 궁색한 변명도 시인 서정주가 광복 후 잠깐 실시한 반민특위에 잡혀가서 한 말이라고 하니 이 말 한마디로 그의 친일 행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고 나서 정통성 있는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정부가 아닌 미 군정의 하수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서정주는 그런 정권들을 찬양했다.

사실 친일 전력은 그가 말한 궁색한 변명으로 면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반민주 정권에 대한 찬양은 정말이지 그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었다. 사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찬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전두환 정권 때는 확실히 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은 북한 공산당의 책동이었다, 1981년 12월에는 직접 TV에 출연하여 전두환 지지 연설을 하고, 1986년 전두환의 생일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는 자판 두드리는 손가락이 민망할 정도이며, 1987년 6월 항쟁의 원인이었던 대통령 간접선거 지지를 밝히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 찬양하였다. 이 역시 정말 내가 했던 말이 아님에도 손가락이 다 오글거린다. 그로 인해 제자였던 고은 시인이나 조정래 작가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사죄를 하라는 회유에도 끝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그이다.

말이 길어졌다. 이 분의 삶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짧디 짧은 멘트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격적으로 시 '국화 옆에서'를 살펴보자.

한때 이 시의 주요 시적 표현의 대상인 황국(黃菊)이 일본 메이지 왕실을 상징한다 하여 전형적인 친일 문학작품으로 거센 논란이 인적이 있었다.  일단 이 시(詩)가 발표된 때가 1947년 11월 9일 자 경향신문이기에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쓰였다 하더라도 발표 시기가 일본제국이 패망한 지 이미 2년이 훌쩍 넘은 시기이기에 그런 논란으로부터는 한발 물러나서 순수 서정시로 여기고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한 송이 노오란 국화가 피기 위한 조용하지만 지난한 노력과 소쩍새, 청둥 소리 등의 청각적 효과가 잔잔한 물 위를 가다 큰 파도를 만난 것처럼 글의 수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삶을 관조하는 듯 살아가는 거울에 비친 누이의 평온한 얼굴 모습처럼 여겨지게 다가와 무서리가 내려 잠이 오지 않는 가을밤을 이기고 핀 노오란 꽃잎의 영롱함을 뽐내는 국화꽃을 따뜻한 방 안에서 마당에 핀 그것들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삶의 용기가 나는 것 같다.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그렇게 외로운 밤, 천둥 치는 무서운 밤을 지나 이제 겨울이 다가오리라는 걱정 앞에서도 당당히 노란 꽃잎을 피워내어 그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 

그런 국화를 장년의 누이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겨울을 앞두고 자연에서 마지막으로 감상할 수 있는 꽃 국화 그 국화의 원숙하고도 의연한 자태를 세상 모진 풍파 이겨내고 이제 자식들 다 키워놓고 마음 좀 놓고 살아가는 누이의 얼굴처럼 편안한 아름다움이 있는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가을이 지나 곧 올겨울에 국화는 꽃을 떨구어내고 결국 누렇게 말라비틀어질지라도 봄, 여름, 가을 자신의 본성(本性)을 다하였기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듯이 누이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였기에 노년의 초라함과 죽음이라는 것에도 달관할 수 있는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을 누이로 표현한 것이다.

마당에 핀 국화꽃을 보고 인간의 삶을 어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점이 서정주 시인의 시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아닌가 싶다.

굴곡 많던 시기 모질지 못한 성품 때문인지 정당하지 못한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여린 마음이 있었기에 조선 땅 자연에 삶을 빗대어 서정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다시 한번 읊어보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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