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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Jun 07. 2021

김남주- 진혼가(鎭魂歌)

뼈속까지 유물론자였을 그가 왜 영혼을 위한 노래를 불렀을까?

조선 땅에 해방이 온 다음 해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머슴의 자식이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김남주. 아버지는 그가 글을 배워 면서기나 군청 서기를 하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처럼 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남의 땅에서 근근이 먹고사는 형편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해질녘까지 일을 해야만 했으므로 시인 김남주는 중학교 때까지 낮에 집에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그는 전라남도 수재들만 모인다던 광주제일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군청 서기보다 더 나은 삶이 보장되는 시기이기에 머슴의 자식은 그렇게 보장된 미래를 가지게 된 듯했다.

그러나 애초 그의 본성은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며 시대에 순응하여 사는 소시민적인 소양은 도무지 찾아볼 수를 없었다.

주입식 교육이 싫어 고등학교를 때려치우더니 검정고시로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이미 박정희 정권이 장기. 독재체제를 확고히 하고자 헌법개정을 하다 하다 이내 유신헌법을 만들고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우리네 민초들을 새벽부터 밤까지 착취하던 시기였기에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그의 말대로 전사(戰士)가 되었고 처절하게 투쟁하다 무려 15년형을 받고 차가운 감옥으로 갔다.


이것이 시인 김남주의 33살까지의 삶이었다.

이후 9년 3개월을 복역하고 1988년 12월 21일 출소하게 된다.

오늘은 그가 감옥에 있었던 1984년 출간된 그의 시집 '진혼가'에 수록된 동명의 시를 감상해보자.


진혼가

                         - 김남주


1

총구가 내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신념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신념 나의 싸움은 미궁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발가락이라도 핥아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유일한 나의 확실성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2

나는 지금 쓰고 있다

벽에 갇혀 쓰고 있다


여러 골이 쑥밭이 된 것도

여러 집이 발칵 뒤집힌것도

서투른 나의 싸움 탓이라고

사랑했다는 탓으로

애인이 불렸다는 것도

숨겨줬다는 탓으로 친구가 직장을 잃은 것도

어설픈 나의 신념 탓이라고

모두가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주먹밥 위에

주먹밥에 떨어지는 눈물 위에

환기통 위에 뺑끼통 위에

식구통 위에 감시통 위에

마룻바닥에 벽에 천정에 쓰고 있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쓰고 있다

발가락이 닳아지도록 쓰고 있다

혓바닥이 쓰라리도록 쓰고 있다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라고


3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은 참기로 했다

신념이 피를 닮고

싸움이 불을 닮고

자유가 피 같은 불 같은 꽃을 닮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죽음을 포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유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

신념아 싸움아 너는 참아라


신념이 바위의 얼굴을 닮을 때까지는

싸움이 철의 무기로 달구어질 때까지는.


김남주 시인 시집 '진혼가' 1984년 中



그가 감옥에 간 이듬해 5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해를 걸러 낙향해서 지내던 몇 해와 서울에서 남민전 활동을 했을 시절을 빼고는 늘 생활했던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아마 그가 남민전 활동으로 구속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불과의 몇 편의 시(詩)만을 김남주 시인의 모든 것인 양 감상하는 비극을 당했으리라. 그의 삶을 돌아 보건대 그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살아남아 전사로서 시인으로서 계속 살았으리라는 예상은 하기 힘들다.

감옥생활 또한 그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이미 몸은 30을 넘어 40을 향해가는데 차가운 감방에서 시들어 갔으며 1930년대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인 무솔리니조차 감옥에서 집필활동만은 허했기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라는 명저를 보상받았으나 우리 군사정권은 그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남주 전사는 이에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우유팩과 은박지에 꼭꼭 눌러 시를 썼다.

그렇게 쓴 시가 그의 전체 작품의 7할이 넘는 360편이다.

우유팩, 은박지 하나하나가 너무나 귀했기에 시인은 떠오르는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정제하고 또 정제하여 시를 형이상학적으로 완성하여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들은 비밀리에 밖으로 보내져 당시 민주화운동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살아움직이는 시대정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인 김남주의 '진혼곡'을 읽고 있자니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라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시인 김남주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조선 땅이 해방을 맞이했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해방이지 독점 자본주의의 일본이라는 피식민국가를 자유주의를 앞세워 초국적으로 인민들을 착취하는 미국으로 갈아탔을 뿐이었다.

그렇게 보니 조국은 광복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 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런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군부 정치세력과 국내 자본가 그리고 언론, 대학 등의 기득권층의 부패가 여전한 상태로 아무것도 모른 체 핍박받는 인민을 위해 지식인 전사 김남주는 손놓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업 총수들의 집에 들어가 돈을 훔쳐 혁명자금으로 쓰기로 하고 활동하다 구속이 된 것이다.

이렇게 뼛속까지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인민혁명을 부르짖었던 그였기에 그는 유물론자였다.

현실을 초월한 곳에 진리가 있다면 내세를 운운하는 관념론자들하고는 격이 맞지 않는 사람이 시인 전사 김남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詩)가 시작되자마자 난데없이 총부리가 머리에 겨누어진 현실에서 자신의 신념이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감옥에 갇혀 자신뿐만 아니라 애인과 친구 또는 혁명의 동지들까지 위험과 곤란에 처하자 또다시 신념은 어김없이 무너진다.

마지막에서는 이내 현실과 타협하여 아직은 때가 아니고 그런 신념 자체가 어설펐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 전형적 패러독스 문학이다.


유물론자이며 혁명의 전사인 자신이 육체가 느끼는 공포에 무릎 끊고 여러 변명하는 말로 있지도 않은 영혼을 달래고 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괘변을 통해 모두에게 저항의 시대정신 흠뻑 먹은 가차없는 회초리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혼(鎭魂)이라는 말이 공산주의자였던 김남주에게는 애초에 있지도 않은 헛소리였을 것이다.

그저 한 번 몸담는 몸이 느끼는 공포에 이런저런 변명으로 혁명의 슬로건이 슬쩍 내려지는 현실에 그가 감옥에서 느꼈을 좌절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특히 전두환 정권을 지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며 경제 발전의 혜택을 조금씩 풀어주며 문화. 여가생활이 자리 잡아가던 시기 군사정권의 대중 기만을 감옥에서 지켜보면서 시인 김남주는 예전보다 더 큰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을 패러독스라는 문학적 기술로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는 시가 바로 이 '진혼가'인 것이다.

우리의 암울했던 현대사를 떠올려보며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헛소리나 마찬가지인 영혼을 달랜다는 시의 제목으로 노래했다는 것이 그가 바랬던 시대정신이 얼마나 많은 기만 속에서 수그러들었는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우리의 초상이 아닌가 싶다.


 - 그렇다고 김남주식의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는 것이 당시 시대정신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김남주 시인의 혁명정신은 그저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인민들에게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이상향적 사회에 대한 희망의 정신이지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북한과 손잡고 나아가는 혁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북한의 사회주의 사상인 주체사상을 가지고 혁명을 하자고 했다면 분명 사회 전복적 이단혁명추구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나 그가 추구한 것은 당시 프랑스나 독일에서 유행했던 68혁명적 내용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는 브런치작가 목가적일상추구의 매우 사견적인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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