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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Dec 22. 2021

자기 앞의 생(生)-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애송이적 인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나

소설가이자 외교관 그리고 비행 조종사였던 로맹 가리.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1975년 발표하여 그해 불문학 최고의 권위 '콩쿠르 상'을 받았던 '자기 앞의 생'.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유대인으로 나치 정권하의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와 창녀로 연명했던 로자 아줌마 그리고 창녀의 사생아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그런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10살 아랍인 소년 '모모'사이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모모라는 열 살(실제로는 열네 살) 어린이 주인공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기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童話)로 생각될 정도로 비교적 쉽게 읽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소설의 알레고리적 효과를 위해 작가의 의도로 여겨진다. 이번 포스팅은 '자기 앞의 생'에 대하여 기존의 관점과는 조금 다른 부분에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럼 1970년대 초 프랑스 파리의 뒷골목으로 그 알레고리를 찾아 떠나보자.            

삶의 무게에 눌린 '모모'가 쭈그려앉아 울고 있을 법한 어느 파리의 뒷골목

우선 이 이야기는 아이의 관점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쉬운 표현으로 소설이 이루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년 '모모'의 꿋꿋한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특히, 모모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에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기도 한다.


당시 무명의 애송이 작가 에밀 아자르로 가장한 거장 로맹 가리는 이 동화 같은 소설에서 소년 '모모'앞에 놓인 생(生)을 그저 한 인간의 힘들고 슬픈 장(場)을 넘어서 미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의 조건들을 초반부터 처절하게 나열하기 시작한다.

먼저 1970년대 초 파리 빈민가. 이건 '모모'가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그 앞에 놓인 그의 생(生)의 장(場) 이었다.  그런 마당에 그가 가지고 있는 조건은 하나같이 무언가의 부재(不在)를 넘어서는 것으로 그는 부모가 없으며 특히,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 채 유대인인 로라 아줌마의 이상한 아파트에서 매달 누군가가 보내오는 300프랑의 돈으로 양육되고 있었다.


그 부재의 조건에 더해지는 살벌한 조건을 살펴보자.


- 먼저 그가 맡겨진 보모는 유럽 사회 애물단지로 취급받는 유대인으로 2차대전 중 나치 정권 하에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목숨을 잃을 뻔했으며 당시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로라 아줌마'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알제리와 모로코 같은 북아프리카와 프랑스에서 창녀로 살아오다 나이가 들어 소설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이상의 엉덩이 장사를 할 수 없어 후배(?) 창녀들의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다.

- '모모'의 이름은 '모하메드'이다. '로라 아줌마'의 수첩에 의하면 아이의 이름은 모하메드이며 당시 모모의 보호자는 그가 회교도로 자라나기를 원했다고 한다. 기독교 사회 프랑스에서 모모는 아랍인이라는 이방인으로 종교 또한 기독교의 대척점에 있는 이슬람교도의 아이였다. 한마디로 이방인 중의 이방인 출신인 것이다.

- 모모가 사는 지역은 파리의 20구역으로 주로 이민자나 빈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실제 그가 거주하고 있는 7층짜리 아파트에는 아프리카와 아랍 출신의 노동자와 창녀들이 사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뭐 하나 가진 것 없이 존재하고 있는 조건들 역시 안 가짐만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소년 '모모'의 삶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런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모모가 늘 궁금해 마지않았던 인간의 삶 속에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그 사랑으로 살면 될 것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성(理性)에 근거한 박애(博愛)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고유한 삶을 파괴(?)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당시 프랑스 사회의 허울뿐인 사회복지제도였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차즘 치매의 증상이 보이는 로자 아주머니.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치매로 인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반하게 병원에 감금(?) 되어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며 사육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각종 약물과 보조 기구에 의지한 채 의미 없는 삶의 연명은 그녀가 겪었던 '홀로코스트'만큼이나 끔찍한 일로 과거의 트라우마가 유대인으로 겪은 비인간성이라면 그녀의 미래의 불안은 식물인간으로 사육되는 무의미한 삶의 연명이었다.

로자 아줌마의 인도적 병원행은 미성년으로 보호자의 부재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모모에게는 인도적 '빈민구제소' 행이라는 현실적인 불안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회복지라는 평등과 박애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는 프랑스혁명정신의 실재가 정작 그 상황에 놓인 모모와 로자 아줌마에게는 끔찍한 지옥의 나락으로 빠지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모모는 그의 앞에 놓인 생의 빈 노트를 무엇으로 채워갈까?

로맹 가리가 유년 시절을 보내 니스. 니스의 종려나무는 프랑스인들에게 우리의 제주도의 현무암처럼 무언가 이국적 휴식처로 인식되는 거 같다. 개인적으로 두 번 가본 니스의 도심 해변

우선 모모의 주위에는 소외되었지만 가슴 따뜻한 이들이 모여 있다.

물론 현실에서 절망적인 사회적 환경에서 이렇게 가슴 따뜻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선입견일까? 아무튼 모모 주위에는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는 하밀 할아버지, 세네갈 헤비급 권투 챔피언 출신으로 현재는 불로뉴 숲에서 여장을 하고 몸을 팔지만 자신이 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주는 롤라 아줌마, 카메룬 출신으로 낮에는 청소를 하고 때때로 거리에서 불 쇼를 하는 왈룸바씨는 노인을 공경하는 카메룬의 전통에 따라 로자 아줌마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나선다. 힘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다며 95킬로가 넘는 로자 아줌마를 7층까지 엎어 나르던  자움 씨네 형제, 그리고 같은 유대인으로 로자 아줌마와 모모를 살뜰히 살피는 의사 카츠 등등해서 하나같이 '모모'에게 삶은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일깨워 준다.


모모 자신도 그런 주위 환경의 영향으로 삶을 부정하기에 너무 나도 좋은(?) 처지임에도 사랑으로 긍정을 하며 살아간다. 특히,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소원인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마치고자 하는 것에 동조하며 끝까지 사랑으로 함께한다.

어쩌면 소설의 첫 부분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에 하밀 할아버지가 '"그렇단다."라고 마지못해 했던 대답에 울던 어린 열 살짜리 소년에서 스스로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라는 답을 얻고 열네 살의 부쩍 자란 모습으로 그에게 남겨진 숯 한 나날의 여생을 아름답게 쓸 수 있는 자질을 함양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그 과정 속에 숨겨진 알레고리에 대하여 말해 보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프랑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파리의  콩코드 광장

우선 소설은 데카르트 이후에 형성된 인본주의의 전통에서 칸트가 완성한 인간다움의 상징이라고 일컫는 '이성理性'적 인물과 상황을 가난하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모주위의 사람들과 대립되는 모순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계몽주의 영향으로 탄생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박애, 평등, 자유'의 가치가 만들어낸 현대의 사회제도가 절대다수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소설 속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성적인 인간과 사회는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에게만 유효할지 모르겠지만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이들에게는 그저 불안의 산물일 뿐이다.


극중 로자 아줌마가 히틀러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이 병원에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온몸을 의사의 처방에 의한 약과 주사에 의지하여 눈만 껌뻑거리는 식물인간의 삶은 불안을 넘은 구체적 공포 그 자체였다.

로자 아줌마는 오죽하면 자신의 아파트 지하 한 칸에 촛불과 약간의 식량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서서히 죽어갈 장소를 마련해 놓았을까?(처음에는 홀로코스트 피해에 대한 트라우마로 생각되었으나 결국 그곳에서 자유롭게(?) 죽어가는 로자를 보며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닌 미래의 불안에 대한 구체적 대비였단 것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모모가 가지고 있는 빈민구제소에서의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혐오 역시 이성적이라는 정상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명백한 자선이요 휴머니즘이겠지만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모모에게는 이 역시 알 수 없는 미래에 닥치게 될지도 모를 구체적인 공포의 대상이었다.

소설의 전체적인 플롯에서도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가난하고 피부색이 다르고 성적인 면에서도 소수자였던 그들은 이성의 산물인 법과 사회제도 안에서 늘 불안을 가지고 사는 힘겨운 이들이었다. 그들은 공유한 불안의 감정에서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하는 것으로 비정상인으로서의 상황을 이겨내려 노력했던 것이다.

특히, 마음 따뜻한 빈민촌 의사였던 카츠와 비정상인이었던 모모주위에 가슴 따뜻한 이들과의 사사건건의 대립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병원에서의 의미 없는 삶보다는 안락사를 택하게 해달라는 로자의 부탁에 불법은 행할 수 없다며 강제로 병원행을 지시하는 것이라든지, 혈액순환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지적에 의자에서 텀블링 비슷하게 둥둥 튕겨주며 서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왈룸바일행과 로자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가벼운 걸음걸이 만이 유효한 운동이라며 질색을 하는 장면에서 과연 이성적인 것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모와 카츠의 대화를 통해 나는 이 동화적인 소설의 알레고리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았을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정상인을 말하는 거다."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中


이렇듯 모모는 그 절망적인 생(生)의 장에서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 즉, 이성적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소설은 정상적인 상황 판단으로 카츠가 생각한 로자의 병원 그리고 모모의 빈민구제소 행을 이루어지지 않게 한다. 이로 인해 로자의 자유로운 죽음과 모모의 자립이라는 비정상적인 슬픔이 오히려 행복한 결말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던 거장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애송이적인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호소력 있게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단순히 사랑으로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는 모모의 성장기 일까?

아니면 이성(理性)이 모두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의 전개였을까?

그냥 남들이 이해하는 가슴 따뜻한 사랑에 대한 동화로 받아들였어야 했나?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요양병원, 빈민구제소, 정신병원 등 이성의 등장 이후 나타난 광기(狂氣)에 대한 정상인들의 공포가 낳은 비정상인들의 공포에 대한 일종의 이의 제기였을까?

읽는 내내 너무도 많은 생각에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조차 힘들었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生"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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