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이탈리아반도의 북쪽 지역으로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신(神)에 대한 봉사가 아닌 현세에서 인간들이 추구할 수 있는 미(美) 적 가치에 혁명적으로 눈을 돌린 이들이 오늘날의 도서관에서 지나온 역사를 말한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일이 이렇게 커질지는 몰랐네요. 정말로요.'라고 하며 이마의 식은땀을 연신 닦았을 것이다.
신(神)에서 인간에게로 눈을 돌린 이들의 선견지명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1618년부터 48년까지 유럽은 20세기 세계 1.2차 대전보다도 참혹했다고 하는 구. 신교도들의 30년 전쟁으로 그야말로 사람의 씨가 말라버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인간의 형이상학에서 금기로 정하고 망각하게 했던 그들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 사고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때(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데카르트가 나타난다.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의 존재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사고해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인간은 사고(思考) 하는 존재로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난 자질로 인간은 신의 종속물이 아닌 만물의 영장이 되는 그런 존재임을 인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리하여 그간 신의 이름으로 넘어서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하여 면죄부를 받으면서 서구 유럽의 과학문명은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속도만큼이나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이것으로 촉발된 산업혁명이라 말하는 정적(靜的)인 역사적 사건이자 자본주의라고 하는 현재도 진행형인 인간의 이기주의적 욕망의 폭주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산업 공장제는 과거 봉건적 사회의 굳건한 버팀목이었던 농노와 가내수공업자와 그 일꾼들을 공장노동자로 유입시켰으며 그들은 부르주아라는 이름으로 뭉쳐 자유라는 이념하에 실제로는 그들의 소유권 사수를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때 한 계급의 출현과 발전이 그야말로 레볼루션급 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서구사회의 기득권으로 자리 잡아 노동자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즈음 지금의 러시아 최서쪽 지방에선 독일인인 칸트라는 샌님 같은 대학교수가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쓰는데 이것이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하여 도저히 한데 어울려지지 않을 것 같았던 경험론과 합리론을 수용하여 정의 내리게 된다.
인간은 순수한 이성(理性)을 가지고 세상을 대할 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갈 수 있기에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은 계몽하여 다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인간적이지 못한 것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이성적 사고로 무장한 이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하여 논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자본주의에 참여하는 각 개별적 존재들의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사회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고,
누구는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누구는 공상적인 공동소유와 생산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는 국가권력의 제거를 통한 자유체제하에...............
그런 많은 철학자 중 인간의 존재는 유물론적으로 인간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고는 인류의 역사와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자본주의의 맹점인 인간 소외(사회 구성의 대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문제를 그러한 이성적 사유와 실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었으니 독일 출신의 철학자 칼 맑스였다.
칼 맑스.
우선 우리가 아는 칼 맑스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맑스라고 발음되는 그가 왜 마르크스가 되었는지 아는가?
'puncture' 이 단어는 우리가 흔히 아는 펑크이다. 타이어 같은 고무에 흠집이 생겨 터진 상태의 기표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쓰자면 펑크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발음이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펑크라 발음하지 못하고 '빵꾸'라고 말한다. 그렇다. 맑스가 발음이 안 돼 마르크스라고 말하던 것이 그대로 한 사람 특히,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 되었다. 펑크를 빵꾸라고 한다면 뭔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듯이 맑스도 마르크스라 부르면 무언가 빵꾸 빵꾸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시대가 와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마르크스'보다 '맑스'라고 이름이라도 제대로 불러주자.
아무튼 이 사람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헤겔의 '변증법'을 가져와 자칭 인간 사회도 과학적으로 사유하여 철학적으로 올바른 세계를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인간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고가 인간 소외라는 다분히 인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가 죽은 지 올해로 140여 년이 되어가는 요즘 우리는 안다.
너무도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생각으로 확신했던 인간 소외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그가 혁명을 외치며 엥겔스와 함께 꿈에 부풀어 만들었던 '공산당선언' 그는 왜 그 선언문을 썼으며 그 이성적이며 과학적 통찰을 통해 그가 확신에 차서 추구했던 사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집필된 이 책은 1848년 2월 21일 런던에서 독일어로 처음 출간되었다. 우선 이 선언문이 인쇄되어 발간된 1848년이 갖는 의미와 당시 있지도 않은 공산당을 운운하며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이라고 세상에 선전포고(?) 한두 개의 의미를 집어 봐야 할 것이다.
1848년의 유럽은 바야흐로 혼란의 시기였다.
'공산당선언'에도 잘 나오듯이 당시 자본주의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독점 자본주의 시대의 중심으로 가고 있었다. 단순히 생산시설을 소유한 자본가가 아닌 규모와 범위의 경제라는 무기를 통해 그들 중 몇몇의 소수 자본가들이 생산 기반을 독점한 문제가 심각해 질대로 심각해진 상태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노동을 위한 최소한의 임금으로 연명하고 있었으며 자본가들끼리 서로 경쟁하며 과연 누가 자본주의 시대의 끝판왕이 될 것인가의 경연장이었다.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인류 역사는 당연히 여기에 반(反) 하는 세력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자본주의를 더욱 옹호하는 친 자본주의 세력은 물론이요. 자본주의사회의 인간 소외 문제를 조정하고 가자는 사회주의자들(협동조합 운동가, 몽상적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등), 과거 봉건적 사회로의 회귀를 꿈꾸는 낭만주의자 등등해서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 이성적 사고로 무장한 각각의 철학자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마치 혼란의 시대 저마다의 철학을 가지고 등장한 제자백가(諸子百家)처럼 많은 철학적, 실천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실제로 1948년 유럽 전역에서 이제는 못 살겠다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비록 당시의 모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대표적인 것이 1948년 프랑스 파리의 2월과 6월 혁명 또는 항쟁이었다.
과거 부르주아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혁명을 이제는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짧게나마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기도 했다.
이렇게 자본주의에 반하는 혁명의 기운이 감도는 유럽을 바라보며 맑스는 무언가 확실히 해둘 하나가 생각났다. 기존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른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실천을 두고 명확하게 다름을 선고할 필요를 느끼고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자신의 사회주의적 운동을 다른 모든 사회주의와 차별화하며 폭력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관계 소유 해체와 더 나아가 국가도 해체하며 오로지 비권력체인 프롤레타리아 동맹을 통해 모든 사회구성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세상에 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공산당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의 정체성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공산당선언'에서 추구하는 혁명의 방향과 궁극적인 그들의 이상향은 무엇인가에 대하여알아보자.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으로 기존의 여려 사회주의자들과 거리를 두며 확실한 정체성을 세웠다.
그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체계를 완전히 전복시켜 노동자계급이 생산 요소와 사회를 장악하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 그 사회를 폭력을 사용하여 쟁취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며 그것으로 그들은 기존의 모든 자본주의 개혁 운동과는 다른 확실한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다.
그들은 부르주아가 독점한 생산시설에 대한 소유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권이 공동소유로 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맹점인 과잉생산 문제로 인한 경제공황이 나오지 않게 사회가 필요한 만큼의 생산만을 하고, 거주. 교육뿐만 아니라 배우자 공유제 및 사회 공동육아 등 지나칠 정도로 평등을 강조한 정책으로 국민 대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행복한 자유 공화제를 지향하였다.
확실히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혁명에 대한 갈증 등을 감안했을 때 맑스의 생각으로는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자연스러운 역사의 발전에 기인된 현상으로 필연적으로 달성돼야만 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자본주의가 곪을 대로 곯아 부르주아계급의 프롤레타리아트 착취가 극에 달 한 곳에서 시작된다고 예언(?) 했다. 프랑스나 독일은 아직 자본주의가 무르익지 않아 혁명은 시기 상조라 하고 자본주의가 그 모순을 더 키워나가게 사태를 방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가 죽고 20세기가 들어서면서 혁명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다.
마지막으로 여담 비슷하게 공산주의 혁명 운동의 실패에 대한 부분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끝을 맺겠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맑스의 주장으로는 자본주의가 팽창함에 따라 그 체제에 잉태된 모순이 극에 달해 자연스레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집으로 이어지고 이내 혁명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단순히 그렇게 되리라는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라 원시시대의 인간 사회부터 당시의 사회까지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역사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 완벽한 증언이었다.
혁명은 생전의 맑스가 예상한 영국이나 자본주의가 좀 더 무르익은 후의 프랑스. 독일이 아닌 당시에도 낙후된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유럽의 마지막 봉건국가였던 러시아 그곳에서 왕권 정치를 타도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자본주의의 폐해를 낱낱이 파헤친 이른바 가장 진보된 철학과 정치 운동이었던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혁명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혁명 후의 공산주의 사회를 이끄는 것에 대한 맑스의 어드바이스가 부족했다.
혁명의 주도한 레닌이 어떻게 혁명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 귀족 출신 관료주의자 스탈린이 나타난다. 이렇게 맑스의 철학에 의한 사회는 채 꽃 펴볼 봄을 맞이하기도 전에 왜곡된 전체주의로 이탈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소련의 실패는 인류에게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폐기처분의 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한 역사였다.
개인적으로 맑스철학의 실패는 인간을 너무 이성(理性) 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헤겔 좌파 모더니즘 사회운동의 처절한 실패로 귀착될 역사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강조하는 감성과 본능을 조금 더 감안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물론 역사의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근래 동유럽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맑스의 인간미 넘치는 철학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했더라도 말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1948년 발표작 '공산당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