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렇게 거창했어야만 했나?
소아시아 그중에서도 지금의 터키 동남부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의 오신(五信)을 숭배하는 다신교 신전을 관리하는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마.
지형이 개방적이라 메소포타니아 문명이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수많은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삶은 피해 가기 어려운 운명이었을까?
그의 기구한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작가 채사장 두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문학 작가이자 강사이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력을 살펴보니 성균관대학교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인문학 저서와 소설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지적 기반은 이미 튼튼하구나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인문학 저자의 소설이라고 하니 왠지 인간의 삶을 너무 큰 철학적 또는 역사적 틀안에 넣어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주제넘은 선입견이 책 앞에서 나를 망설이게 했다.
역시나 책의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주인공 소마의 전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지금의 터키나 이라크. 이란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세계에 자리를 잡아 마치 알렉산더 대왕처럼 서쪽으로는 루마니아부터 동쪽으로는 이란에 이르는 거대한 왕국의 황제가 되는 소마. 또 그가 살아온 국가의 체계도 정치와 종교지도자가 통합된 지역부족체에서 시작하여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중세 국가 그리고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제.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을 연상시키는 소마의 반동적인 왕정복고까지 서양의 역사를 소마라는 한 인간의 삶으로 모든 것을 녹여내려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차피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쓰고 싶었다면 존 윌리엄스의 '스토어'나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처럼 소소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 문제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와닿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처음의 선입견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인간에 대하여 너무 큰 인문학적 틀에 맞추려 한 것은 분명히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의 작은 마을 신전을 관리하는 자의 아들로 태어난 소마.
전쟁을 예견했는지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높은 언덕의 정상에서 마을 저수지 쪽으로 쏜 화살을 주워오라고 한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들개 한 마리와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낸 소마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고 마을은 기독교 국가 군대에 의하여 쑥대밭이 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주검이 되었다.
죽은 엄마 곁을 지키던 소마는 누군가에 손에 의하여 들쳐져 먼 이국땅의 집으로 입양 아닌 입양아가 되는 신세가 된다. 소마가 가게 된 곳은 서쪽 기독교 국가의 왕족으로 아이가 없던 집안에서 사무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들의 아들처럼 자라게 된다.
아버지 밑에서 다신교의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자란 소마는 기독교 세계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다시금 배우며 성장하게 된다. 그 와중 왕국의 왕의 서자로 여동생이었던 소마의 집에 양자로 오게 되는 헤렌.
그는 소마의 삶에 있어서 대립되는 악(惡)의 존재가 된다.
헤렌에 의하여 파양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처지가 되었으나 양어머니 한나의 도움으로 기독교 기사단에 들어가게 된 소마. 그들 사이에 이교도 적의 모습을 한 소마는 당연히 주류가 아닌 주변인으로 자연스레 경멸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소아시아 지역을 떠나 지금의 동유럽 지역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숙명적으로 하나가 아닌 대립되는 무엇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억울하게 핍박받던 소마는 어느새 복수의 화신이 되어 모든 것을 갈아엎고 크레도니아라는 무신(無神) 적 공화제 국가의 군사령관이 되어 마침네 자신이 자랐던 그 한(恨) 서린 아데사 왕국을 멸망시키고 크레도니아에 병합하게 된다.
이제 소마는 세상을 다 가진 자가 되었다. 크레도니아는 서쪽으로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남녘으로는 서방세계와 동방세계를 잇는 무역항 차쿠날레가 있었다. 비옥한 곡창지대와 앉아서 어마어마한 세(稅) 수입 올릴 수 있는 무역항이 있는 나라의 군사령관인 소마. 그는 공화제 국가의 군사령관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의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대관을 수여함으로써 크레도니아의 황제가 되었다.
본디 신과 하나 됨을 추구하는 조그만 부족 공동체에서 태어났던 소마는 기독교 왕국의 왕가(王家)에 입양되어 공화제 국가의 군 사령관을 역임한 황제가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소설 속의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내면과 대화하던 어린 시절의 소마는 없고 권력과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무엘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반동에는 또 다른 반동의 변증법이 성립되는 것은 역사의 쳇바퀴 속에서 증명된 과학이다.
권력에 취해 있던 늙은 소마는 일종의 쿠데타를 통해 축출되며 눈과 귀 그리고 혀를 잃고 말았다.
이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오롯이 자기 자신뿐이었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소마는 비로소 다시금 내면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욕망의 허무함을 느끼며 늙은 몸으로 듣고, 말하고, 볼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 만큼 불행하지 않았다.
소마는 그렇게 삶의 진정한 의미 즉 내면의 충만함을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그 삶을 다시금 깨달으며 조용히 산짐승에게 몸을 내주며 삶을 마감한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 내면을 돌보는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 꼭 이렇게까지 거창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신 분이 있다면 일단 저와 생각이 비슷한 부류입니다.
그것도 굳이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와 이란. 이라크와 서쪽으론 루마니아에 이르는 먼 곳의 낯선 역사와 종교를 가지고 말이다.
인문학적 주제를 놓고 보면 지금의 보편적 인류사(?)라고 할 수 있는 이원적. 일원적 세계관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곳이 그곳이라고 생각해 보면 적절한 설정이라고 해도 아무래도 그런류의 것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아쉬운 마음이 개인적으로 크다.
하지만 낯선 가치로부터 인간의 삶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끌어내어 공감을 자아내는 부분은 절로 감탄사가 나오기에 그런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마라는 낯선 주인공으로부터 우리의 사고방식의 왜곡에 대하여 공감하고 내면으로 돌아와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가치에 대해 카타르시스를 받고 싶다면 한 번쯤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평하며 근래 화제작 채사장의 첫 장편소설 '소마'에 대한 간단한 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