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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ug 01. 2023

파리의 우울- 샤를 보들레르

낭만의 도시 파리가 왜 우울했을까?

사진 속 눈빛조차 우수에 찬 인물 샤를 보들레르.

그가 경험한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길래 인류 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악(惡)에서 꽃을 보고하고 아름답게 노래한 시인이 되었을까?

그의 삶과 19세기 중반 혁명이 휩쓸고 지나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지배하게 된 도시 파리에서 그가 왜 우울했는지 '파리의 우울'을 통해서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여행을 떠나보자.


우선 이 여행을 위해 그가 살다간 1821년 4월부터 1867년 8월 31일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샤를 보들레르가 태어난 1821년 4월 9일의 약 한 달여 후인 5월 5일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는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쓸쓸히 영면에 들어섰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지 6년여만의 일이었다.

샤를 보들레르가 태어난 때는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종결자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제 혁명의 깃발 아래 기요틴의 칼날 아래서 피비린네 나는 숙청도, 유럽을 거의 세계대전급으로 전쟁으로 내몰던 나폴레옹도 사라져 소위 아름다운 시절 '벨에포크'로 불리던 100년 평화의 시대(1914년 제1차 대전 발발전까지)가 도래하고 그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 평화로운 시기 프랑스혁명으로 다져진 부르주아적 사회 분위기 속에 파리는 그야말로 모든 계층이 각자의 욕망을 위해 몰려드는 한 밤의 수은등 같은 곳이었다.

그 파리에서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앙드레 지드, 헤밍웨이, 릴케 등이 교류하며 글을 썼고, 마네와 모네 그리고 피카소, 모로 등은 각자의 미술의 세계에서 창작열을 올렸다.

바로 이런 시대적 환경 특히,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던 시대의 요구는 다양한 예술적 감동이었다.

출처: pixabay.com

샤를 보들레르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이런 시대적 혜택을 그야말로 몸소 누린 사람이었다.

1821년에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사실 유복함만을 타고났지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 그의 아버지 프랑스와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 카롤린 드파이와 결혼했을 때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로 그녀의 어머니와 나이차가 무려 34살이었다. 보들레르가 6살 때 세상을 등진 아버지 그로 인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지만 어머니의 재혼으로 얻게 된 의붓아버지는 완고한 성격의 군인 출신 외교관으로 성공하지만 유독 예술가적 기절이 넘치는 보들레르에게는 애초에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그는 그 유복함과는 반대로 가는 불운의 사나이가 된다.


낭비벽으로 인하여 치산자 선정을 받고 그의 문학적 재능이 함축되었던 시집 '악의 꽃'은 문단과 대중의 환호는커녕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몇 편(6편)의 시는 정부 검열에 의하여 도려내어지고 벌금형까지 선고받는 작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다 생계를 위하여 강연을 다니는 등 말년에는 가난과 건강 악화로 고통받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작가이다.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삶이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이며 그가 죽기 전 울분을 토하며 세상을 조롱하듯 써 내려간 것이 '파리의 우울'이며 이는 그의 사후 2년 후에 출간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샤를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귀족 출신으로 새롭게 세상의 주인이 된 부르주아 계층을 경멸했던 그의 정치적 성향에서도 알 수 있고 또 제목을 통해서도 쉽게 느끼겠지만 자유주의 사상이 지배했던 파리를 우울한 도시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소수의 부르주아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고통받는 지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조금만 더 살아 1871년 3월 파리코뮌을 목도했더라면 과연 어떤 일들을 벌이고 어떤 글을 썼을까? 귀족 출신으로 오로지 왕정복고만을 주장 강 건너 불 보듯 했을까? 아니면 경멸했던 부르주아들을 타도하고자 과감히 힘없는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었을까?


사실 파라의 우울을 보면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하다 가난한 파리 시민의 비극적인 모습을 '소산문시'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형식으로 표현한 점을 유추해 보면 그가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외치지만 알고 보면 이기적인 부르주아들의 사상에 얼마나 반감을 느끼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실제 그가 20대 후반 시절 경험한 1848년 2월 혁명은 또다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제로 바뀌었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한 부르주아혁명의 완성과도 같은 사건으로 이를 경험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개인적으로 서술한 역사적 사실과 보들레르의 정치적 성향을 엮어 읽으면 그나마 낭만의 도시라고 불리는 파리가 당시 왜 그렇게 우울한 곳이었는지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사실 '소산문시'라는 장르가 수필인지 시(詩)인지 지금도 애매모호한 장르로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샤를 보들레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시대를 어떤 생각으로 살다 갔길래 이런 특이한 생각과 형식으로 글을 썼을까 하는 질문에 스스로 생각들을 정리해 보면서 작품에 대한 몰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글일까 싶어 이 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을 쓰고 간지 약 40년 후인 1902년 체코 프라하 출신의 독일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28살의 덴마크 출신 귀족 '말테'를 등장시켜 파리는 우울이 아니라 공장에서 재화를 찍어내듯 빈민 병원에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죽음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지옥으로 묘사한 '말테의 수기'를 떠올리며 파리지옥 시리즈 1편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과 2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함께 감상해 보며 1968년 68혁명 이후 그나마 나아졌다던 프랑스 아니 우리들의 자본주의 민낯에 대한 르포를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시도일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마지막으로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름휴가차 방문했던 파리-150년이 훌쩍 지난 파리는 보들레르와 릴케의 느낌처럼 우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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