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가적일상추구 Oct 21. 2020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하지만 다른 의미의 삶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쿠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출신의 여류 작가 올가 토카르추쿠의 '태고의 시간들'을 읽었다.

해마다 가을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읽기를 과업처럼 행하고 있었는데 2018년도는 노벨문학상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미투 논란에 올라 2019년에 2018년, 2019년 수상자를 한 번에 발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게 2018년을 밋밋하게 지나고 나서야 두 명의 작가의 책을 손에 쥐었다.

먼저 펼친 소설 '태고의 시간들'읽기는 나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태업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사실 책을 받아 들고 1/3 정도만 읽고 덮고 말았다.

이유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 무척이나 바쁜 나머지 정신을 가다듬고 읽어야 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작품 읽기가 버거웠기 때문이었던 거 같다.

아무튼 1년이 지나 읽은 '태고의 시간들' 제목만큼 쉽지 않은 책 읽기였다.

우선 폴란드 역사에 대한 이해가 적었고 가톨릭 또는 서구 유럽의 신화적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와 작가가 심리상담사 출신이라 그런지 개인적, 집단적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기에 쉽지 않은 독서가 되었다.

'태고의 시간들'의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그녀의 책을 읽기 위해선 종교, 정신분석학, 유럽 신화, 유럽 근현대 역사 등 많은 부분의 지식이 필요했다.

이 책을 잘 읽기 위해선 소설의 제목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태고(太古)는 우리말로 아득한 옛날이라는 뜻으로 폴란드어로는 프라비에크(prawiek)라 한다.

제목은 태고이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0세기 폴란드 역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제목은 아득히 먼 옛날의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시대적 배경은 근현대라는 미스매칭이 머리를 갸웃하게 만들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왜 주인공들의 삶이 버무려지는 시. 공간적 배경으로 태고라는 단어를 가져왔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소설 첫 장에 태고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백강과 흑강이 흐르고 동서남북의 경계를 천사가 지키는 마을 그곳의 이름을 태고라고 하는데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과거의 인간들의 삶이 현재 그리고 미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태고'라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아득히 먼 시간이라는 점에서 과거 인간들의 삶이 현재를 통해 미래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톨릭 종교 전승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먼 과거 우리 인류가 문자를 만들어 우리의 일을 기록하기 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었던 것으로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도 그저 많은 신화(神話) 중 하나였던 것이다.

신화를 말 그대로 직역하면 신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문자 발생 전 고대인들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이야기 일 수도 있으니 먼 과거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신화적 요소들이 깊게 자리 잡은 태고 마을에서 미하우로 대표되는 니에비에스키가문 3대의 이야기가 그 현재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또 그들의 가족이 미래를 어떻게 살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태고의 시간들'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신화라는 다소 초현실적인 틀에서 연결된 하나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려 한다.

태고에서 니에비에스키가문과 그의 이웃 그리고 주변 사람과 동식물, 어처구니없이 죽어 세상을 떠도는 혼령과 죽음 후 갈 곳을 찾아 바로 어디론가 가는 영혼과 그리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신(神)까지 인간의 사유가 미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의 각각의 시간을 태고 마을에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듯이 비벼내고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여성, 유대인, 장애인, 노동자, 무지렁이, 광녀, 소시민적 군인  등 거대한 역사 앞에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많은 민초들의 이야기가 처절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떻게 그들이 소외되고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다 못해 가슴 미어질 정도이다.

먼저 미하우는 러시아군에 소집되어 만주에서 전투를 했다고 하는데 시대적으로 러일전쟁보다는 러시아 적군(赤軍)에 소집되어 당시 백군 잔당의 저항이 심했던 극동지역에서 싸운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성당의 주교에 의해 정상의 삶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여자들이 마녀 취급을 받았던 시대 크워스카와 그녀의 딸 루카 그리고 플로렌티카의 소외된 삶.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독일군과 소련군의 주둔과 이웃 주민이었던 유대인 학살, 전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당하는 태고 마을 사람들. 

그러고 나서 공산화된 폴란드 사회의 격변과 실패한 공산주의로 인한 경제적 파탄 및 1990년대 개방정책까지 폴란드 근현대사에 대한 통찰을 통한 민초들의 삶을 기독교적, 정신분석학적, 신화학적 등으로 다양하게 접근하며 종교와 이데올로기 대립 그리고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 기저에 자리 잡은 공동체적 무의식이 어떻게 내리 적용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태고 마을과 비슷해 보이는 폴란드 풍경(네이버 블로그 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 읽기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잖아라는 위안을 연신 나에게 해가며 읽은 소설 '태고의 시간들'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사실 좀 의외였던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소개하면 이렇다.

유럽인의 시선에서 기독교적 신(神)의 몰락과 크워스카가 죽은 이지도르에게 한 기도가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신의 몰락이라는 표현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소설 속 신의 이야기는 구약의 이야기와 대부분 일치한다.

소설 속에서 신은 나이 들어 늙어 지치자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단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며 인간처럼 죽음이라는 사라짐 속으로 침잠하거나 영원불변의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낸다.

이 부분은 우리가 만들어낸 기독교적 세계상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인정하고 나서 작가는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동경 내지는 대안 제시하고 있는데 소설 속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지도르의 육신은 이미 숨을 멈췄고, 심장도 더는 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크워스카는 이지도르를 향해 몸을 숙이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세상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얼른 떠나렴. 다시 돌아오라는 꼬임에도 절대 넘어가선 안 돼."

소설 '태고의 시간들' 中


올가 토가르추쿠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늘 변화하는 세상에서 영원불변의 세계로의 구원은 없다.

그저 고통받고 상처뿐인 인간의 삶의 굴레 즉,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열반에 오르라고,,,,,,, 쉽지 않았던 독서 올가 토카르추쿠의 '태고의 시간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림받아도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