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족히 10년은 된 것 같았다. 물론 당시 큰 감동이나 인상 깊은 점이 없었기에 기억 저편 그저 아 그 책 읽어봤지 하는 정도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소설 '그 후'
그러던 중 2017년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 후'가 개봉했다길래 한 걸음에 달려갔더니 역시나 관객이 채 10명도 되지 않는 조조 극장에서 조용히(?) 감상하였다.
막연히 나쓰메의 소설과 제목이 같네 였던 나의 생각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봉완이 자신으로 인해 불편한 경험을 한 아름에게 이 책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마무리함에 그 영화와 이 책 사이에 무언가가 있구나 싶었지만 당최 소설의 내용이나 의미하는 바를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의구심은 언젠가 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나는 영화를 보고 삼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금 당시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책장을 뒤져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찾아내 책장을 펼친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남녀관에 대한 변명이든 논리적 근거이든 거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소설 속의 주인공 다이스케가 친구의 동생이자 또 다른 친구의 아내인 미치요를 사랑하다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픈 욕망에 고민하던 차에 나온 답이 '자연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시대적 관습의 소산인 '의지의 인간'보단 낫다는 결론에 이른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내 독서의 시발점이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에 대한 총괄적 서평은 아니기에 그 부분에 대한 야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이 소설은 1909년에 발표한 소설로 1868년부터 1911년까지 지속된 메이지 시대 끝자락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확실히 자리 잡은 일본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당시 구(舊)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주인공 다이스케의 아버지 나가이 도쿠는 메도 시대 사무라이의 후예로 실업계에서 성공을 거둔 재력가이다. 그는 성실과 열정으로 살아온 당시 일본 자본주의 사회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이다. 그런 아버지와는 다르게 다이스케는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생활을 위한 노동 그러니깐 모든 열정을 바치는 노동만이 진정한 노동인데 자신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노동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니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논리로 그저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로 책과 그림 같은 예술에 관심 두고 사는 부르주아 딜레탕트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이 있으니 아버지가 요구하는 정략결혼이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그런 결혼에는 관심이 없으며 대학시절 친구의 여동생이자 또 다른 친구의 아내인 미치요에게 연민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며 결국엔 그녀와 함께하는 삶만이 자신의 어떤 소명처럼 받아들이며 부르주아적 삶을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2021년의 우리들에게도 다소 의아한 결말의 소설이다.
이 소설로 2021년 대한민국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112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일본인들이 느끼는 감동을 똑같이 받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이며 그런 연유로 왜 이 소설에 일본인들은 그렇게 열광하는가에 대해서도 사실 이해불가 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1909년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하면 왜 그가 얼마 전까지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인지에 대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될 것이다.
우선 1909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5년 전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마르크스가 예견한 대로 독점 자본주의 체계로 이행된 때로 한마디로 말해서 수요와 공급의 문제에서 공급이 과잉되어 불경기적 요소가 가득 차 폭발 일보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때로 소설의 곳곳에서도 불경기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 문제점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 국내의 경제문제를 식민지 개척을 통해 나름의 해결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로 그야말로 자본주의적 사고가 팽배하고 일본 전통의 가치는 재고의 여지도 없는 구시대의 청산적 유산으로 여기던 한마디로 당시 일본 사회의 가치관 혼란이 극에 달하던 때이다. 그런 즈음에 일본 나름의 가치를 정립하여 여과 없이 들어온 서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만들고자 했던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적 노력이 어찌 일본 사람들에게 감동적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는 일찍이 천재라 불리며 일본 최고 아니 당시 아시아 최고인 도쿄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국비로 영문학을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도쿄제국 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최고 중의 최고의 엘리트였으니 일본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최고의 경외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소설이지만 사실 115년 후 조선반도에 사는 나에게 그의 소설이 무감동인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난 그와 그들의 역사와는 영 딴 세상에 살 와 왔고 우리의 70~80년대를 생각하면 일본의 1909년의 시대상이 왠지 모르게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도 억지로 끼워 맞춘 결과이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 지는 기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그 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영화 '그 후'의 한 장면
이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에 그래도 나름의 재미가 두 군데 있었는데 언급하자면 이렇다.
첫째는 결혼도 안한 남자가 버젓이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이니 나에게 오라는 식의 남녀관이다. 이게 지금도 조금은 파격적인데 내가 이를 문학 속에서 처음으로 목도한 것이 스콧 피츠 제럴드의 1925년작 '위대한 개츠비'인데 이 소설을 보며 역시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것이 우리보다 100년 이상은 앞서 저 안드로메다를 날아가고 있구나 싶었는데 이 소설은 그보다 16년이 빠른 1909년 그것도 유교적, 불교적 사회관을 지닌 동양의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럼 우리 조선은 당시 어떠했는가? 기록에 의하면 조선 땅의 첫 현대식 이혼은 1930년 국내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이라고 한다. 이유는 불륜인데 1930년 경성 법원에 합의 이혼서가 제출되어 근대식 이혼의 역사 시작을 알렸다고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나혜석은 1934년 '이혼고백서'를 출판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1909년의 소설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의 사랑관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파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에서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을 언급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이 대학을 문학 부분에서 명문 대학으로 치켜세우고 있는 점이다. 그럼 왜 '도시샤 대학'을 문학 명문 대학으로 언급하는 장면이 흥미로웠느냐? 바로 우리 현대 시문학의 원류(源流)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시인 정지용과 윤동주가 이대학 영문과 출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정지용, 윤동주 시인이 단순히 도시샤대학 학풍의 영향으로 위대한 한국 시문학의 대부가 되었다. 아니면 그들의 독창적이고 민족적인 시문학 날개에 순풍만을 불어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후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다행히 도시샤대학에서도 이 둘을 인정하는지 정지용,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각각 대학 교정에 있다고 하니 당시 도시샤대학의 문학적 학풍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다.
이상 위대하지만 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