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인 당시 일본에서도 꽤 낙후되었다고 하는 혼슈의 최북단 아오모리현 출신의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쓰시마 슈지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그의 집안은 금융업을 하고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인 소위 부잣집 금수저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공부를 잘하여 명문학교 상위권을 유지하다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 제국 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이 정도 스펙이면 평생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원하는 대로 살수 있을 것 같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의 자살을 시도한 끝에 1948년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시도가 성공(?) 하여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오늘 이야기할 소설은 그의 대표작인 '인간 실격'인데,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완성작이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 후 일본인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남겨졌던 불후의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나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작가의 자전적 내용이 많기에 소설은 인간 사회에 대한 냉소에 기저를 두고 전개되는 등 내용 자체가 어둡기에 읽기가 다소 불편할 수 있으나 그렇기에 전후(戰後) 일본 데카당스(퇴폐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럼 먼저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살펴보자.
소설의 주인공은 다케이치 요조이다. 부잣집 도련님인 요조는 어려서부터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장 두려울 정도로 대인기피 증세가 있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병약한 어머니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고 귀족원 의원이자 금융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는 그가 대하기엔 너무 가부장적이자 권위적인지라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그저 익살로 인간관계를 연명시키듯 살아가는 유약한 소년이다.
그런 성격은 점점 폐쇄적이 되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간파당하는 것도 싫고 더욱 싫은 건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사는 듯한 인간 사회의 위선적인 모습이다.
다케이치는 남들처럼 인간인 척 살아가기보다는 여자와 술 그리고 마약에 빠져들며 스스로 파멸을 선택한다. 결국 인간 사회에 다하여 염증을 느끼다 못해 이내 모든 것을 놓고 그저 숨만을 쉬며(그것도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살아간다는 내용으로 실제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많은 부분 닮았으나 소설 속 주인공 요조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여 그저 만화나 춘화를 그리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도쿄 제국 대학 출신의 당시 꽤 인기 작가의 삶을 살았던 부분은 서로 크게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마지막 연재 원고를 완성하고 자살을 하였기에 그의 실제적인 유작으로 전후 실의에 빠졌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어떤 부분이 어필되어 영웅적인 작가가 되었는지를 마지막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945년 미국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자 서둘러 태평양 전쟁을 마무리 짓기로 한다.
오키나와에 상륙은 했으나 도쿄에 이르르려면 아직 많은 관문이 남았기에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하고 그 위력에 혼비백산한 일본제국은 미국에 바로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이 원자폭탄 두발로 끝나자 당시 일본 사회를 휩쓴 것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러려고 그 전쟁을 치렀나? 자괴감을 느낀다'였다. 1853년 초여름 페리 제독이 1852년 미국 대통령의 일본을 개항시키라는 명령을 받들어 에도(도쿄의 옛 이름)에 나타나 1858년 미일상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본격적인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고 빠르게 발전(?) 하여 이내 1905년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1910년에는 대만 그리고 북으로 만주와 중국 본토, 서쪽으로는 필리핀, 베트남, 태국을 거쳐 목재와 원유가 있는 인도차이나반도로 향하고 그것을 위해 당시 미국령이던 필리핀을 중간 기착지로 삼고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진주만 폭격 사건을 일으키는 등 일본의 자본주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만큼이나 왜곡되어 가고 있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횡행했던 그 시절 일본의 모든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여 당장의 아내와 미래의 자식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나라에 바쳤다.
하지만 두발의 원자폭탄과 함께 그 희생과 희망은 무참히 밝혔다.
일본 독점 자본주의 몰락과도 같은 두발의 원자폭탄 투하
위대한 태양의 제국인 대일본제국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차라리 본토에서 너 죽고 나 죽자 연합군과 싸워서 졌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역사를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전쟁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당연히 일본 사회는 자괴감이 온 나라 전체를 짓눌렀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부터 전체가 아닌 개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다자이 오사무였다. 이제 패망한 일본에서 전체주의는 더 이상 먹힐 가치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이 자신을 개항하여 자본주의로 이끌었던 미국의 배신(?)으로 패망했고 그런 미국에 패전한 관계로 당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올랐던 공산주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으니 일본은 이데올로기 공황상태였던 것이다. 젊은 지식인들을 선구자로 하여 전체가 아닌 개인의 실존 문제에 대하여 점차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정신적 개조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 바이블 역할을 했다고 할 것이다. 주인공 다케이치는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자본의 혜택을 거부한다. 또한 공산주의 사상에도 접근을 해보지만 그 사상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직감하는데 그것은 그의 인간 사회에 대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실존적 문제였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같은 집단적 신기루에서 벗어난 인간의 삶이란 위선과 가식이 난무하는 중구난방의 아비규환이었던 것이다. 가식 없이 살아가는 착한 이들을 위한 배려가 없는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겐 인간 실격의 낙인이 찍히는 사회이기에 당시 일본 사회는 무언가 큰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서 사람들은 오자이 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에서 희망을 본 것이다. 퇴폐주의를 의미하는 데카당스 문학이 왜 전후(戰後) 일본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는지에 대한 이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소설'인간 실격'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당시 일본 젊은이들이 퇴폐주의에서 왜 희망을 보았는지 그리고 아직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이데올로기적 시대 담론이 아직도 사회 주류 이슈인 우리나라에서 좀 더 개인의 건전한 실존을 위해 어떤 부분에 가치를 두고 나라의 변화를 꾀할지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부분이 많은 소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