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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하루 Jun 07. 2023

오늘은 하현망간의 달입니다

저녁하늘 보기

문득 하늘을 보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화창하게 푸른날이면 괜시리 눈길이 더 가죠. 어느 날은 저녁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날이 좋지 않아 안개에 가려서인지 아니면 도심의 불빛때문인지 별은 커녕 인공위성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달은 보였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별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저 오늘따라 새하얗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아이폰을 업데이트 했는데요. 배경화면이 달라졌다해서 뭐가 달라진걸까 들어가 보았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별다른 의욕도 없을 뿐더러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졌으며 내가 쓸만한 게 뭐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휴대폰의 상향평준화 시대에 새로운 시리즈가 나왔다고해도 크게 들뜨지 않는데, 더욱이 자잘한 업데이트는 딱히 기대할 만한 건이 아니었습니다. 해봤자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쓰지 않는 AR따위의 신기술이 아닐까했습니다. 그냥 오류나 개선을 통크게 반기별로 한번씩만 해줬으면 하는 불량한 고객의 입장으로 업데이트를 했습니다.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평생 보내고야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알림 메세지를 그만보자는 마음에 업데이트를 한 저는 꽤나 심드렁했습니다. 그렇게 귀찮은 마음을 무릅쓰고 업데이트를 하고, 개선되었다는 배경화면을 보았지만 역시나 딱히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돌아다니다보니 야심차게 내놓은 신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배경화면 테마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현재 위치에 맞추어 실시간으로 천문 현상을 배경화면에 일러주는 식이었어요. 마침 배경화면을 바꿔볼까 하던차에 깔끔하기도하고, 실시간으로 보여준다하니 괜찮은 것 같아 선택하게되었습니다.


’23년 6월 6일 현충일은 하현망간의 달

그러고 며칠이 지나 보니, 배경화면 상단에 달 이름이 써있더라구요. 보름달, 초승달, 윤달은 들어봤는데. 처음보는 달 이름이 생소했습니다. 그냥 지나치기를 며칠, 또 익숙한 달 이름이 반복되어 화면에 나타나는 걸 언뜻 보게되었습니다. ‘아, 이게 달이름이 몇 개 없구나.’ 하는 마음에 검색해보았습니다. 생각처럼 달 종류가 아주 많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세상에 하나 밖에 없으니 당연한 걸까요. 아이폰에서 구분하는 달의 종류는 8개. 크게 구분하면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삭(윤달) 4개로 구분할 수 있지만, 아이폰에서는 주축이 되는 이 네 개 달 사이에 오는 달 이름도 추가로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쓸데없는 데 친절하고 디테일한 애플이란걸 새삼 느꼈네요. 이왕 알게된김에 누군가에게라도 잘난척좀 해보자 하는 심산으로 여덟 개의 달 이름을 모두 외웠습니다. 내가 무수히 떠있는 별을 이어가며 별자리 이름을 말하지는 못해도, 떡하니 보이는 달 이름은 말할수 있겠구나 싶어서 말이에요.


차례로, 삭(윤달)-초승달-상현달-상현망간의달-보름달(망)-하현망간의달-하현달-그믐달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 애인과 함께 거리를 어슬렁 걷다가 하늘의 달을 보고 불현듯 휴대폰의 달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나름 외웠는데 바로 생각나지 않아, 휴대폰에 써있는 달 이름을 다시 보고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언질도 없이 뜬금없이 달 이름을 말하니 어이없어 하긴 하더라고요. 듣는 이는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보란듯이 추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추석의 보름달이나 초승달 이외에 제가 아는 나머지 여섯개의 달에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처음엔 뿌듯하게 자랑하는 꼴이 우스워 제 모습을 보느라 잘 듣지 않는듯 했으나, 한 쪽으로 가늘게 보이는 달이 모두 초승달이 아니며 왼쪽과 오른쪽이 보일때 이를 부르는 명칭이 서로 다르다고, 하나 하나 달의 특징에 대해 말해주니 퍽 흥미로워 하더군요. 저녁이 될 때마다 어김없이 떠있는 내 인생에 하등 의미없어 보이는 달에도 날마다 찾아오는 이름이 있다는 점에 신기해 하는 듯 싶었습니다.


이제와 보니 그럴만도 합니다. 조그마한 별도 규칙성을 찾아 사자자리니, 처녀자리니 이름을 짓고 하루의 운명을 점치기도 하는데 커다란 달은 아무렴 그렇겠죠. 미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삶에 여유를 가지자며 보증금을 내고 한 달간의 하늘 사진 찍기 챌린지는 더러 하지만, 저녁 하늘을 기록하자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매일 찾아오는 건 같은데, 저녁 하늘을 소홀히 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녁 하늘을 본다.’는 의미가 낭만적으로 사용되는 때가 많이 없어서 이려나요. 별보고 출근(등교)하고 별보고 퇴근(하교)한다고 하잖아요. 여행지에 가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들에 압도됨을 느끼지만, 그건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일입니다. 그나마 추석에는 보름달을 언급한다지만, 그날조차 휴일이네요. 인생을 하루로 비유했을 때에도 밤이란 인생의 종착지에 다다름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니 참 서글프겠어요. 하루의 시작도, 마무리도 그저 반복되는 현상의 일종인데. 어둡고 무섭다하여 홀대받는 밤이라는 존재가 조금 불쌍해집니다.


여느 노을진 세월의 중년에게는, 어둑한 저녁이 그 간의 노고를 보상하는 인생의 피크타임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잠에 드는 저녁과 새벽에 집중이 잘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는 귀중한 업무 시간일 수도, 퇴근 후 이제서야 공부할 여력이 나는 야간 대학 학생에게는 기회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어둑한 삶의 시간이 어찌 값지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름 붙이지 않으면 무엇이 되었든 그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고, 비로소 말로 언급치 않으면 망각되듯 낮에 주로 생활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회자되지 못한 저녁 하늘의 달에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자꾸만 사라져가는 저녁의 소중함을 하늘의 달을 보며 되새기려 합니다. 벚꽃에 일렬종대로 일렁이는 산책길 봄 풍경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쨍한 초록빛의 여름 풍경, 유독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사진으로만 봐도 코시린 뾰족한 나뭇가지와 어우러진 빛바랜 겨울 하늘. 사 계절의 낮 풍경과 더불어 특별하지 않게 매일 찾아오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다 보면 무심결에 지나갈 하루의 의미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소중함을 좀더 자주느끼다 보면 나와 아끼는 이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할 수 있을 지도요. 그래서 잊지 않게 하는 그 매개체가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 달의 이름이 종종 생각나지 않으니 당분간 배경화면은 유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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