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이럴 줄 몰랐어요
사모의 길은 힘들다고들 한다.
친한 친구들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닭꼬치를 파는 상인 분도 내 걱정을 하신다. 한편으로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으니 괜찮다고 말해주는 분들도 계시고, 영광스럽게 하나님께 묶여있는 자리니 잘해보라 격려를 받기도 한다.
나는 늘 씨익 웃었다. 남편과 함께 하는 결혼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사모로서 첫 발을 내디딘 교회에 가보니 성도들의 사모에 대한 기대치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사모 별 것 아니네, 했다. 이렇게 조용히만 다니면 되는 거지.
사모 라이팅은 나도 모르게 시작됐다.
훌륭한 사모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아빠의 설교쯤은 사실 귀여운 축에 속했다. 실체가 있는 가스 라이팅은 알아채기가 쉬우니 분리해내기도 간단하니 말이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스멀스멀 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컨디션 난조로 목이 아파 성가대에 서지 못한 날은 나는 분명 아파서 쉰 건데 어딘가 모르게 꾀병을 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예배 시간에 급하게 화장실이 가고 싶은 절대적인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도저히 예배당을 박차고 나갈 수가 없어 온 몸의 신경을 엄지 손가락으로 보낸 후 꾹꾹 참아냈다. 성가대석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면 지금 나간 사람 사모가 아닌가 수군대면 어쩌나, 이 조용한 예배당의 분위기를 깬 사람이 사모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게 나를 더 답답하게 했다. 코로나로 조심스러운 상황이니 컨디션이 안 좋으면 성가대를 자제하는 게 나쁜 일이 아니고, 예배 도중에 화장실이 급하게 가고 싶으면 최대한 조용히 나가면 그만인 일이다. 아무도 내게 사모가 그러면 쓰겠냐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귓가에 쟁쟁 울리는 소음을 저항해낼 재간이 없었다.
친한 사모님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도들의 생각을 어렴풋이 전해 듣는 일은 채반에 흩뿌리고 흔들어도 여전히 걸러지지 않은 큰 알갱이들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사모인 내가 조금 더 이타적인 마음으로 행동했으면 남편이 성도들의 원망을 덜 샀을까, 남편의 부족함을 나의 내조로 풍성하게 채웠다면 우리 남편이 더 훌륭한 목사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내 몸에 꼭 박힌 알갱이들에 쌓여 완전히 포위됐다.
그 많은 성도들의 기대치를 무슨 수로 예상하고 다 맞추어 살 수 있단 말일까. 각자가 원하는 목사상, 그들이 바라는 사모상은 마치 사방에 펼쳐진 거미줄 같이 촘촘하게 느껴졌다. 이슬이 맺힌 거미줄은 육안으로 보고 피해 갈 수 있지만 성도들 개개인의 요구를 간파해 100%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남편 따라 간 부서 수련회 예배에서도 자유하지 못했다. 목 터져라 찬양하고 목 놓아 울며 기도할 수 있는 그 예배의 자리에서 조차 나는 보이지 않는 타인의 눈치를 봤다. 사모가 교사도 아닌데 예배에 왜 왔지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했다가도, 사모가 예배에 코빼기도 안 비친다고 여기면 어떡하나 싶었다. 잠깐 예배만 드리고 가야겠다 맘먹었다가도 기도회 마무리 전에 그냥 갔냐는 이야기를 듣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교회가 싫어졌다.
나는 예배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엉엉 울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놓고 싶었던 게 다인데. 사람 앞에 나를 내어놓기가 꺼려져서 도저히 교회를 가고 싶지가 않았다.
뭘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대부분 간단한 듯 말한다. 일 더하기 일은 이잖아! 그런 생각을 그냥 하지 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마음에 담아두지 마. 하지만 일 더하기 일이 이라는 명제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긴 고뇌의 밤들이 있었을까.
언제나 그렇듯 답은 예수님이 가장 잘 아신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익숙한 장면이었음에도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정오, 피부가 아플 정도로 햇볕이 강한 시간에 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 수치스러운 삶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생긴 피해의식,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던 한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을 열었고, 곧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뛰쳐나간다. 그간 피해왔고 두려웠던 사람들에게 달려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정면돌파.
그녀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구했다는 것은 그동안 큰 갈증이 있어왔다는 뜻이다. 예배에 대한 갈증과 하나님을 향한 큰 갈증이 예수님을 만나고 해갈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더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준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를 만나러 와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그 삶이 그녀를 모두 앞에 당당히 서게 한 것이다.
묘했다. 나는 남편이 하나라 그녀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예배에 목이 마른 모습이 같게 느껴졌다. 아. 내게도 예수님의 터치가 필요하구나. 굳게 잠긴 나의 마음을 주님 앞에 열어두어야 하는구나.
하지만 내 마음대로 은혜를 받거나, 나의 의지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예배로 마무리되었다.
남편은 내게 일러주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알려주는 명패가 달려있다고.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며 이곳저곳을 성전답게 리모델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아직 타인의 시선과 판단, 평가에 자유하지 못한 내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나 둘 굳은 고집을 제거하고 새로운 진리를 쌓아주시기를 기도한다.
교회 가기 싫은 내게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코로나를 허락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기나 저기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주일을 보낼 것이다. 성전 된 나의 마음에 최고의 예배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만나고 새롭게 변화된 나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도들 앞으로 자연스레 이끌어주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더는 교회가 싫지 않도록,
나는 그저 잠잠히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뿐이다.
내 삶을 안으신 그 사랑
그 사랑만으로 나 완전하네
비교할 수 없는 그 사랑
이제 다른 것들은 내게 힘없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할 때
모든 두려움 사라져 그 사랑 안에 자유하네
주 사랑이 날 감싸네 날 채우네
주 사랑이 날 비추네 변함없네
그가 내 안에, 제이어스
https://youtu.be/Uvubf1dqS7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