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랑의 이유
솔직함이 통통 튀는 매력 중 하나라지만 때로는 마음을 터놓는 일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슴 한가운데에 턱 하고 박힐 때가 있다.
사모로 느끼는 중압감이 버거워 예배가 싫다고 징징거린 며늘아가가 시어머님 눈에는 한없이 어려 보이고 부족해 보였나 보다. 초신자 믿음이어서 어쩌냐고, 사모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뒷말을 듣게 되었다.
응? 초신자 믿음? 31년 동안 모든 주일을 교회에서 웃고 울며 반주에 교사에 성가대 그리고 청년부 리더를 도맡았던 내가 초신자 같다고? 어디 그뿐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고민과 기도 그리고 말씀과 은혜로 발버둥 치며 살아온 나의 신앙 여정은 이미 몇 십 편이나 글로 기록을 남겨뒀거늘!
분했다. 나를 잘 모르시면서 함부로 판단하신 어머님이 미웠고, 내 믿음은 절대 네버 초신자 같지 않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하고 확인받고 싶었다. 남편을 붙들고 난 초신자가 아니라고, 오빠도 잘 알지 않느냐고 몇 날 며칠을 들들 볶아댔다. 남편은 어머님이 당신을 잘 모르고 한 얘기니 한 귀로 흘리라 했지만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쓰라렸다.
새우등을 한 채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데, 사모답지 못했던 행동과 말투가 스멀스멀 생각나기 시작했다. 흥분하면 거칠어지는 말투, 속상한 일이 있으면 뒤돌자마자 흉을 보는 나쁜 버릇들. 마음이 힘들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교회의 공예배를 자주 빠지기는 한 것 같아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시어머님 말마따나 어쩌면 나는 초신자와 같이 미성숙한 믿음을 가진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싸.
한심했다. 그것밖에 안된다니. 결국은 상대를 탓하는 방어기제가 나를 자책하는 방어기제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저 이렇게 보니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에요. 너무 못난 모습이 많은데 하나님 나를 사랑하세요..? 하나님 나를 사랑..
사랑하는 아이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놀라웠다. 하나님은 낙담한 내게 사랑한다 속삭이시며 함께 가자고 손을 뻗어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고백에 어안이 벙벙해 그날 밤을, 그다음 날을 그리고 그 한 주를 아가서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했다.
무작정 읽어나갔건만 모두 다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아무리 읽어도 전혀 모르겠는 형식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하나님은 많고 많은 절 중에 한 구절을 통해 내게 다시 찾아와 주셨다. 사랑하는 아이야, 너는 아무런 흠이 없구나.
하나님은 내게 사랑한다고 다정스레 말씀해 주셨건만 사실 나는 여전히 공허했다. 말씀이 아니면 낫지 않는 병. 때마침 수요예배날이네, 할렐루야.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를 아시나요? 아 이건 찐이다. 하나님은 과연 내 마음에 난 불에 대해 어떠한 브리핑을 하시려는지 꼭 들어봐야 했다.
하나님에게 구원받을만한 단 하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에 감격과 감사로 반응해야 합니다.
아.
내가 놓치고 있던 게 바로 이거구나.
벼랑 끝이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초신자 같지 않아, 내 신앙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것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혼자만의 중얼거림으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공로였던 것처럼. 내가 하는 모든 것으로 나의 구원을 이뤄가는 사람처럼. 지금까지 해온 일이 부정당하면 더는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특별할 것도, 보통일 수도 없는 인간이 돼버릴까 봐. 인정하는 순간 벼랑 끝으로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 앞으로든 뒤로든 자유로이 뛰어내릴 수 있게 되었다. 벼랑 밑에 있는 커다란 안전장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든든히 서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고 나니 이해되는 원리였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 절대 뛰어내릴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구원해주셨음이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으면, 결코 자신의 허물을 직면하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과정이 참으로 아프고 힘이 들었다. 내가 진짜 형편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이.
금요 예배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 주 내내 하나님과 대화하며 어려운 마음이 풀리고 나니 기도회가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설레었다. 마치 소풍 가는 어린아이의 발걸음처럼 총총 신이났다.
헉.
말씀이 잘 들리지는 않았다. 온유에 대한 말씀이 이거였나? 이리저리 말씀을 재단하고 판단하느라 놓쳐버리는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곧 하나님은 내게 들으라 하셨다. 막힌 두 귀를 활짝 당겨 열어주시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_빌립보서 2:6-7
비우셨다고?
이럴 수가. 예수님의 낮아지심, 겸손하심 등등 참 익숙한 워딩인데 비운다는 이 말이 어찌 이리 새삼스러울 수 있는지. 동태눈으로 멍하게 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과연 나는 나를 비워내며 살아가고 있나? 초신자 믿음이 되기 싫어 손끝에 닿는 뭐든 붙잡아 욱여두고 나의 존재를 든든히 채워 넣으려 한 건 아닌가?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온유한 자의 삶이라 하신다. 곧이어 나온 기도 제목을 보니 나의 소욕을 따라 살았던 삶을 회개하라고 한다.
목놓아 울며 기도했다. 그동안 내 욕심만을 따라 살았구나. 예수님처럼 나를 비워내기는 커녕, 어떻게든 나는 잘났다고 증명하기 위해 남을 손가락질하며 살았구나.
이런 죄인이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건데. 나는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발버둥 치고 있던 거다. 나는 예수님이 죽어줄 만큼의 극악무도한 죄인, 보잘것없는 죄인까지는 아니라고 말이다.
교회 중 2층 맨 오른쪽 자리에서 울며 기도하던 이 날.
나의 존재의 허무함을 마주했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값없이 선물로 받고 누리는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귀한 은혜였다. 너무나 감사한 은혜. 돌아서면 죄짓고, 누우면 죄짓고, 숨만 쉬어도 죄만 내뿜는 나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러주셨음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장님과도 같았던 나의 눈을 열어 이 모든 것을 보게 하심이 어찌나 큰 감격인지.
발가벗겨진 내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해도 이내 쿨하 인정할 수 있는 이유. 저지른 죄와 쌓인 허물이 스멀스멀 올라와 나를 정죄할 때도 곧 단단히 버틸 수 있는 까닭.
이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셨어.
이런 날 알면서도 예수님께선 사랑하여 죽어주셨어.
감사와 감격뿐 인 게 맞았다.
그의 구원 앞에 터져 나오는 반응이라고는 감사와 감격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초신자 믿음이어도 정-말 괜찮다. 뭐 생각해 보니, 내 가 미성숙하게 행동한 부분은 좀 있는 것 같다. 사모로써 당연히 아직 멀어 보이기도 한다. 인정하고, 성숙과 열매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열심히 달려가면 되는 거다.
이렇게 나는 상처를 툭툭 털어냈다.
초신자의 믿음이면 어떻고, 고급자면 어떤가.
예수님 날 위해 죽어주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