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아 어딨니?

숨은 감정 달래주기

by 아링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니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_호세아 11:9


윤수는 내 마음에 콕 저장해놓고 싶은 사랑스러운 아이다. 사슴같이 크고 맑은 눈망울은 출구 없는 매력 포인트.

내 손을 도움 삼아 등원 버스에 올라타며 느릿느릿 대답을 할 듯 말 듯 모든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나서야 Good morning Teacher, 인사해주는 버퍼링 느린 친구지만 원에 도착하고 어느 정도 몸이 풀렸다 싶으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만큼의 활발함을 보이곤 한다.


별똥별처럼 똘똘한 눈빛으로 칠판을 바라보고 큰 소리로 막힘없이 지문을 읽는다. 손은 번쩍 들어 귀에 바짝 붙인 채, 단단한 숨을 배로 보내고 우렁차게 대답한다. 쓰기가 많은 phonics와 writing 시간에는 tired 하다는 군말 없이 영어 단어와 문장을 척척 써 내려간다.


칭찬 스티커 10개는 거뜬히 받아낼 만한 수업 집중력이 이리 대단하지만 어기적대는 아기곰 같은 윤수가 날개 단 듯이 활개 치는 때는 사실 따로 있다.

하루 동안 마실 물을 물병에 채울 때나 하원 전 신발을 갈아 신을 때 그리고 화장실에 갈 때는 반 아이들과 함께 한 줄로 움직이는데 윤수가 할 일을 다른 친구보다 먼저 끝낸 순간이 바로 그 시점이다.


나머지 친구들을 기다리는 사이에 눈치를 슬근슬근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줄 맨 앞으로 종종걸음 쳐 전속력으로 달려와 팔과 다리를 휘감고는 양 볼을 비비적거린다.I love teacer, Teacher is so cute를 내 귀에 캔디 6세 버전인가 싶을 정도로 무한 반복하며 모든 에너지를 애정 표현에 쏟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윤수가 나를 이만큼이나 사랑해준 것은.




해가 바뀌면서 양 어깨에 차곡차곡 쌓인 학습량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지도하는 나조차 맥이 빠진 어느 날 6교시였다. 원에 가기 싫다고 펑펑 울어버렸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공부가 싫다는 오만가지의 제스처를 취하는 윤수에게 언짢아진 나는 대체 며칠을 더 두고 봐야 하나 싶었다. 적응하려니 힘든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언제까지나 아기처럼 스르륵 고개를 돌려 딴짓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동면 상태에 들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6세 맞춤형 훈육의 말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눈 앞에 떠오르는 뜨거운 말로 나무랐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윤수의 반격에 당황해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다.


Teacher Bad!!


선생님 나쁘다는 한 마디 하고 홱 토라져 도깨비 눈을 만들어 씩씩댄다. 윤수는 잘못한 것이 있어 혼이 나면 무조건 싫고 일단 나쁘다며 강한 콧바람 내쉰다.

순간 윤수의 태도를 고쳐주기 위해 작정하고 혼을 내야 하나 고민한다. 어른 알기를 하늘같이 알아왔던 나에게 선생님 나쁘다는 말은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니까.


하지만 아이에게 너 어디서 선생님한테, 라는 말로 전쟁을 선포하고 승리의 깃발을 손에 쥐고 싶지는 않았다. 책상에 엎어져 억울해하는 아이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이가 마음이 아팠다면 나의 훈육 방식에 분명한 문제점이 있었을 테니.숨을 가다듬고 윤수야, 부른다.




선생님이 화를 내며 혼을 내니 윤수가 많이 속상했나 보다.
그래서 선생님이 bad 하다고 한 거구나.
윤수가 속상할 만큼 화를 내서 선생님이 미안해.
다음부터는 Teacher Bad 가 아니라 I’m upset 이렇게 속상하다고 말해보자.
이제 조금 더 힘내서 하던 페이지를 다 끝낼 수 있을까?



잠잠히 듣고 있던 윤수는 고개를 들어 끄덕이고 어느새 기분이 풀어져 티쳐가 좋다며 연신 웃어댄다.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고 하원 버스에 탑승할 때까지 내 뒤만 쫄래쫄래 쫒는 강아지 방울이 같은 윤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내 마음도 보드라워진다.

그 후부터였던 것 같다. 기본 아이템으로 장착해둔 살가운 애정표현에 덤으로 티쳐의 마음을 살펴주는 기능이 업데이트된다.같은 반 친구들이 내게 무더기로 달려들며 안기느라 난리법석을 떨 때면 여러 명에 둘러싸인 티쳐가 걱정되는지 Don’t do that! 친구들을 엄하게 말리는 모습이 아기 호랑이처럼 용맹스럽다.이따금씩 초점이 흐려져 제 할 일을 다 못할 때에는 기어코 또 한 소리 듣지만 더는 Teacher bad 하지 않는다. Okay, teacher 하고는 의젓하게 자세를 고치고 연필을 바로 잡는다.


아이는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마음을 활짝 열고 상대를 신뢰하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윤수는 자신의 속상한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헤집어 꺼내놓을 것뿐이다. 벌컥 찾아오는 감정에 가장 당황스러운 건 아이 본인일 테니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함께 공감해주고 감정을 다루는 적당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네 모습 그대로를 존중한다는 표현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도 그와 같다.

나를 매우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도 나의 깊은 아픔 먼저 알아주시고 곪은 마음 그대로 품어 따스하게 보듬어 주신다. 행여 내가 하나님께 하지 못할 짓과 해서는 안될 말로 그 상처를 내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불같은 화로 임하지 않으신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다정히 말씀하신다.

아이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당해도 싸다는 대접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죽을 만큼 더러운 죄를 저지른 나를 내치지 않으시고 무자비하게 다루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버려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되찾아내셨기에 그렇다.


그 사랑 알기에 윤수의 마음 알아줄 수 있었다. 날 사랑하신 하나님 마음 담아 윤수를 뜨겁게 사랑하기에 가능했다.

애초에 따뜻한 말로 훈육했으면 이 사태도 없었겠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 믿는다. 아이를 최선으로 교육하며 나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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