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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Mar 27. 2021

이상한 이상형, 이상적 이상형

이상형의 재정의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숱하게 들어온 질문에 이렇다 할 썩 괜찮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건 아직도 내 취향을 잘 모른다는 뜻이거나, 그동안 유지 보수해온 가치관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멋모를 때는 겁이 없으니 남는 건 큰 목소리다. 저 키 큰 사람 좋아해요! 남자다운 덩치에 신앙도 열심히면 다 오케이! 씩씩하게 외치고 다녔고 어느 정도 검증도 받았다. 키 크고 듬직하면 다른 건 정말 안보네? 남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만한 확고했던 이상형은 한동안 변할 리 만무했다.


 변화는 상처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쫓아다닌 건 터미네이터의 은박지 색 같은 얄팍한 껍데기였음을 깨달은 뒤로는 이상형을 읊어대는 수준이 달라졌다. 그러면 좋은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 는 말을 입에 수시로 달고 다녔다. 내가 만났던 (내 눈에는) 멋진 남자들은 대게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을 했다. 고로 마음 넓고 다정하며 대화가 통해야 된다는 게 수정된 사항이었다. “키 크고 듬직한”은 여전히 유효하니 수정이 아니라 추가라고 해야겠다.


 오랜만에 들은  질문을 한참 동안 곱씹어보다가, 지난 10 동안 무너질  없이 높이 세워두었던 이상형은 빈껍데기와 같은 나에게 맞추어진 허상일  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보기에 좋은 요건과 듣기에 올바른 조건을 나열해 뻔대 나는 이상형을 만들어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구나. 이런 사람 보면 제게 연락하세요!  번호는 010..


“겨우 서른”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은 이혼 후 전남편과 연하남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곁에서 묵묵히 듣던 친구는 이야기한다. 그동안 부모님과 전남편에게 의지하며 살았으니 이제는 스스로 살아보는 것에 집중하는 게 어떠냐고. 그리고 나면 누가 네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거라더라.


 내가 어떤 사람이지? 반문하기 전에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 지를 생각해보면 어떠한 기준으로 사람을 정의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로 사람의 성향과 성격을 파악하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며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또한 삶의 전반을 이루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 나누길 좋아한다.


 나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을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파악하고,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서 이성과 감정이 반응하는지 알아야 한다. 좋아하는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을 파악해 진로를 탐색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주변과 관계 맺으며 형성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바르게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나 많은 나의 모습을 깊게 본 후에야 상대에게 내밀 카드를 고심해서 뽑아들 수 있지 않겠는가. 가장 큰 몇 가지를 추려 타협할 수 없는 선 안에 두어야 내게 잘 맞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전자기기 플러그를 뽑고 본체의 전원을 끄느냐 마느냐의 사소한 문제까지 다 맞기를 기대할 수는 없으니 큼지막한 사항을 우선으로 두자는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춰가는 건 (배우며 이해하는 일) 누구를 만나든 평생에 걸쳐 느긋하게 해야 할 일이고.


나를 가장 나답게 해 주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그런 것. 그 패를 우리는 이상형이라고 불러야 한다. 로맨틱한 상상에 부합하는 백마 탄 왕자님을 화려한 수식어구를 사용해 묘사해내는 게 진짜 이상형이 아니라, 담백하고 수수한 언어로 요점을 깔끔하게 뱉어낼 수 있는 게 바로 현실적인 이상형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보며, 자기 존재를 확신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지체 없이 이상형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구체적인 언어와 생생한 현실감을 곁들인 채로.


그래서 나의 이상형은 뭐냐고?

어쩌다 묻는 사람이 생기거든 생긋 미소 지으며 말해주어야겠다. 어버버 쫄지 않은 채로 여유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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