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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Mar 21. 2021

이 언니 여름 쿨톤이네!

나랑 잘 맞는 컬러, 내게 찰떡인 사람

 친한 동생들과의 모임날이었다. 다 같이 까르르 웃고 떠들며 곱창과 치킨을 양 볼 가득 넣어 먹고 있는데 문득 동생이 날 유심히 보더니 무심한 듯 예리한 한 마디를 휘리릭 날렸다.


언니 이 색 잘어울리는데?
....
이 언니 여름 쿨톤이네!


 잠옷을 입기에는 시간이 일러 검정 레깅스에 크롭 기장의 여리여리한 파스텔톤 소라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동생은 이 언니는 이런 색이 잘 어울린다며 전부터 느꼈던 조각들이 이제야 맞아떨어진다는 듯이 나의 피부는 여름 쿨톤임을 선언했다.


뭐? 내가 여름 쿨톤이라고?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본 적은 없었고 뷰티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편도 아니긴 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뭐가됐든 쿨톤은 절대 아니라는 것. 쿨톤의 이미지는 전형적인 계란형 얼굴선의 피부가 하얗다 못해 투명한 광채를 띄는 미인들의 전유물 비스무리 한 것 아닌가! 나는 꺼무잡잡 노란빛과 진한 살색 또는 황색 그 어디쯤의 톤을 소유했는데 그런 내가 신성한 쿨톤의 영역에 발을 내밀 수 있다고?


그때부터 퍼스널 컬러의 전쟁이 시작됐다. 동생들 중 진짜 뷰티 전문가는 없었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객관성만큼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조만간 다 같이 예약을 잡아 퍼스널 컬러 진단을 가기로 했으니 더 정확한 건 지켜봐야 알겠지만 여름 쿨톤의 이상적 컬러들을 입었을 때 형광불이 탁 켜진 듯 얼굴빛이 환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동생들은 입을 모아 나의 여름 쿨톤설을 기정 사실화했다.


 옷장을 열어보니 한평생 가을 웜톤의 자격으로 열심히 사다 나른 베이지와 브라운 계열의 옷가지들이 여기저기에 누워있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색들을 다 소화한 단말이야! 마지막 반론을 제기했으나 가을 웜톤 동생이 성큼 다가와 집히는 아무 옷을 슬쩍 대보았을 때 찰떡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충격에 입을 꾹 다물고 항복을 선언했다. 나는 갈색이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네. 세련된 멋짐이 뭍어나는 색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나의 얼굴빛을 죽이는 컬러였다니!


그뿐이 아니었다. 흑발을 한 채 눈썹은 왜 라이트 브라운으로 그리는 건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던 동생이 날 앉혀놓고 직접 화장해주기 시작했다. 그레이 브라운 아이브로우를 사용해 평소보다 두꺼운 모양으로 눈썹을 그려주고, 눈두덩이 주변은 연한 베이지 계열의 쉐도우 톡톡 발라 깔끔하게 떨어지는 아이라인을 쓱 그어줬다. 쥐 잡아먹은 듯 입술 전체에 바르던 풀 레드 립을 지우고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넣으니 촉촉한 앵두 같은 입술이 완성되었다.


 내가 본 언니 모습 중 오늘이 가장 예쁘다는 동생들의 칭찬에 마음이 풍년으로 넘치는 쌀 가득 쟁여놓은 곳간 마냥 부유해졌다. 내 코트를 걸쳐보다 실수로 와인잔 하나를 깬 동생에게 아. 무. 런 감정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나의 모습 만족도는 백점 만점에 백점이었다.


 나를 최대한 나답게, 꽁꽁 숨겨진 장점을 찾아 살리는 퍼스널 컬러와 화장법은 비단 겉모습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더라. 타고난 신체 컬러와 꼭 맞는 베스트 컬러가 존재하듯이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소울메이트가 존재한다. (퍼스널 퍼슨이라 멋대로 명명하려다가 그에 근접한 표현은 모두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소울 메이트가 아닌가 싶어 정정했다)




 한 껏 멋을 부리고 엄마가 주선한 선을 보러 갔다. 어떠한 기대는 없다. 그렇지만 조금의 희망도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실낱같은 희망이란 표현이 이런 상황에 떠오른다는 게 참 우습지만 겪어 본 사람은 알 거다. 서로의 실물을 확인하기 바로 5초 전이 얇디얇은 희망의 존재로 인해 가슴이 사뭇 저릿저릿 한 순간이라는 걸.


 이 분은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깔끔한 인상에 댄디한 스타일 그리고 미소가 순박하신 분이었다. 눈높이가 같을 건 알고 있었으니 다른 것 말고 사람 자체에 집중하려고 했다. 키가 밥 먹여주니.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불장난이 산불로 번지듯 위험하니 바라지도 말아야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더는 질문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직장 이직 취미 자기 계발 주식 재테크 교회 공동체 친구 연애 경제적 독립 등등 편하게 나눌 만한 이야기는 다 한 것 같다. 선을 나가서 다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는 보통 이렇다.


 처음 만난 자리니 이러쿵 저러쿵 할 상황도 아니고 이리저리 재단해 판단할 수도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흐트러진 퍼즐들을 주워 한 데 모아놓고 전체를 맞추는 일은 단번의 만남, 고작 두세 시간으로 이루어질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말을 했으니 이런 사람일 거야, 라는 그럴듯한 추론을 멈추고 연락이 온다면 최소 두 번은 더 만나보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 걸리던 그분의 어휘 선택과 대화 전반을 이뤘던 반복되는 내용으로 추측되는 그의 인생 가치관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지만  온 몸의 쓸 데 없는 감이란 놈이 소리치고 있었다.


네게 맞는 베스트 컬러는 아니야!


 조용한 성격과 허허 웃는 소박함은 어쩌면 천방지축인 나를 잘 보듬고 품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면 성실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생활 태도도 훌륭하고 예수님 따라 살려한다는 말도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저 Not bad color 인 것 같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이제는 나의 나됨에 대해 진지하게 들여다볼 차례였다. 무슨 색을 입어야 화사한 버전의 내가 되는지는 자신이 파악해 찾아서 적용해야 하니까.


 나의 베스트 컬러는 예수님  믿고  먹고  사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가치관은 아닌  같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의 비율은 나의 인생전부이지 일부가 아니다. 선교와 목회만이 그를 100으로 얻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디에 심기웠든 그곳에서 작은 천국이 일어나길 소망하고 매일 만나는 영혼을 위해 눈물과 땀을 뿌리고 심을  있는 마음이 예수를 전부로 삼은 보화를 품은 밭이다. 바로  가치관이 나를 환하게 빛내줄 파스텔톤 소라색과도 같다.


 그분이 가진 고유의 컬러가 나의 소라색인지, 과연 나는 그에게 베스트 컬러가 되어줄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단지 이 밤에 감사한 것은 사랑스러운 동생들 덕분에 나의 본질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예쁠 수 있는 색과 나와 딱 맞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은 주어진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여름 쿨톤의 아니면 이 글을 적은 오늘이 꽤나 무색해지겠다.


동생들, 우리 예약은 언제로 할까?


#사진출처_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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