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칠 거면 물건만 고쳐주세요!

아이는 고치는 게 아니에요

by 아링


어떻게 이 아이를 고쳐주지?


이번 주만 해도 연달아 두 명을 탈탈 털었다. 한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아이는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를 들들 볶아 결석을 해버린다. 제 고집을 꺾고 정해진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은 부지런히 쌓아놓은 모래성이 난데없는 파도에 휩쓸리는 것과 같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꾸준히 등원하는 일은 번데기 안에서 포근히 뒹구는 걸 포기하고 세상으로 나오는 일과 같다. 나름의 설계도를 가지고 어여쁘게 꾸며놓은 성이 무너졌을 때의 참담함 모를 수 없고, 얽매일 것 없이 자유한 나의 공간에서 뛰쳐나오는 일이 얼마나 큰 결심이 요구되는 일인지도 이해한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이 앞으로 마주할 사회는 인정사정없이 마음 후려치기를 특기로 삼는 곳일 테니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애가 닳기는 어머님도 매한가지다. 갈수록 버릇 없어지는 아이에게 꾸중은 늘어가고 아침마다 침대 속을 파고드는 아이와의 입씨름은 멈추는 날이 없다.

선생님 어째야 해요, 걱정 열매를 한 그릇 드시고 울그락 불그락 빨개진 얼굴로 발 동동 구르신다. 어머님들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을 수 있음은 언제나 든든한 위로이자 원동력이 된다. 사공이 많아도 목적지가 같던지, 나 혼자 사공 다 해 먹던지 해야 한다.


첫 번째 아이는 충분한 사랑과 인정이 부족해 스스로를 세우고 지키느라 바쁜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친구를 배려하거나 상황을 수용할 만한 여유가 없다. 혀를 반만 사용해 아기처럼 말하고 티쳐들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내려갈 생각을 않는 걸 보면 그것 외에 달리 생각나는 이유가 없었다. 어머님은 사랑 줄 만큼 많이 주셨다며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셨다. 몇 년 전 둘째가 생겨 첫째 콤플렉스가 생길까 우려되어 더 신경 써주셨다며. 하지만 어머님의 노력은 과거형에 그쳐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오늘도 그만큼의 사랑이 새로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잠시 잊으셨나 보다.


두 번째 아이는 그동안의 잦은 결석과 지각으로 현재 레벨을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전해드렸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등원시켜주셔야 한다고.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어머님이었지만 여전히 아이의 의사가 저 멀리 선두를 달리고 있으니 앞으로도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아이를 존중하는 것과 아이의 의사를 100% 반영해주는 건 별개의 문제다. 어느 아이가 노력이 필요한 고단한 일을 스스로 해보겠다고 나서겠는가. 어른에게도 포기는 달고 성실은 쓴 법인데, 아이는 오죽한가 말이다.


답답한 마음은 묵직한 무게로 깊게 가라앉기만 했다. 아무쪼록 앞으로 지켜보고 더 고민해보자는 숙제를 받으니 마음 편할리 없었다. 내가 제시했던 대안이 어머님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니 정답이 아닌가 보다. 여러 번 생각해도 그게 맞는데, 이게 아닌가? 싶더라. 어쨌든 지금 이런 태도를 싹 고쳐야 하니 두 명 다 혼을 내주어야 할까 해서 평소보다 눈꼬리와 목소리 볼륨을 업 시켜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 되어봤다.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후회가 막심한 건 맞았다. 지나고 보니 대체 내가 뭘 하겠다고 어머님들과 난리 치며 상담하고 아이들을 코너로 몰아세웠나 현타가 왔다. 그 충격은 사실 어제 브런치에서 본 글 이후였다. 아이의 부족함만을 보지 말고, 잘하는 부분을 세워주며 강점을 찾아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라는 이웃 작가님의 글을 읽고 요즘의 내 모습을 반성했다.


아이를 고쳐주려고 동분서주하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고쳐주겠다며 소매 걷고 혼을 내신적이 있던가?



부끄러웠다. 어머님들께 나는 뭔가를 아는 것처럼 잘난 체하고 아이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알아듣지 못할 표현만 사용해 너 이거 고쳐! 잔소리한 것 같아서. 하나님은 나한테 단 한 번도 고쳐라, 무섭게 지적하지 않으셨다. 고쳐지지 않으면 어쩌니, 실망감에 혀를 끌끌 차신 적도 없으시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하신 말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게 다였다. 너 왜 그랬니? 그러니까 호언장담 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거 고치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 말 안 듣더니 이제 좀 알겠니? 나라면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듯 쏘아붙였을 텐데, 예수님은 아무 말 않으시고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잠잠히 물어오실 뿐이었다.


몇 백번의 실수와 답이 없어 보이는 치명적 결점에도 주님은 마음의 진정성을 먼저 봐주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내 존재의 한계를 인정해주시고 나의 안에 숨겨진 원석 같은 모습을 자연스레 끌어내 반짝반짝 윤이 나는 보석으로 다듬어주신다.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한 은혜를 입은 자였다.


아이는 고쳐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드라이버 들고 나사못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 뚝딱 제 기능을 되찾는 물건과 달리 사람에게는 그 나사못으로 인해 마음에 흠집이 생기고 상처는 진하게 곪아간다. 고치려는 노력은 결국 갑과 을의 힘의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고, 두려움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일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온전한 사랑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했다. 그는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굴복시키는 분이 아니다.


대신 아이는 우리의 고민이 필요한 존재다. 아이를 더 사랑하기 위해,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기 위해, 아이가 가진 작은 달란트를 찾아내 열 달란트, 백 달란트로 거두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먼저 사랑받은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도로 키워내야 하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선물 같은 아이들.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야말로 고쳐질 수 없는 아이가 변화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르겠다.


고치기보다 고민하자.


하나님이 나를 얻으려 독생자 아들을 버릴 계획을 세우신 것처럼 방법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나를 살리려 목숨을 버리기 위해 밤새 기도하셨던 것처럼 기도하자. 보기에는 느리고 답답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하셨던 방법으로 살아야겠다.

사진출처_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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