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 반가운 낯섦 반쪽 난 기대감
대학 졸업과 동시에 스쿨 인턴쉽을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꿈에 그리던 외국 생활을 안전한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경험하다니, 할렐루야. 더군다나 전 학년의 아이들을 아우르며 깊은 애정을 나누었던 덕분에 티칭에 대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부풀어 올랐다. 내 길은 티칭이구나, 나도 꼭 내 클래스를 맡아봐야지.
6개월의 비자 연장은 거절되고 허겁지겁 짐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때마침 잘됐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으니까 크리스마스를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아이들은 내가 집에 몰래 숨어서라도 크리스마스까지만 자기들과 같이 지내자고 찡얼댔다. 얼마나 멋진지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나의 귀국에 많이 서운해했다. 비자 승인이 나서 1년을 꽉 채워 올 수 있었더라면 크리스마스는 물론 자신감 넘치는 나의 모습도 볼 수 있었을까.
한국으로 돌아와 며칠간 푹 쉬고 본격적으로 취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토익은 980점, 오픽 스피킹은 AL라는 등급을 받아 기분은 좋았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 품을 다시 떠나 서울에서 자취할 생각에 막막했고, 콧대 높은 영어 유치원에 원서를 넣어볼 생각도 못했다. 보나 마나 나는 안될 거라는 지독한 열등감이 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를 않았다. 실패를 맛보기 싫어 실패가 없는 길을 탐색했다. 작은 동네지만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유명한 이 곳 어딘가에 아이들과 영어로 소통하고 영어를 즐겁게 가르칠 그런 곳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몇 년 전 얼핏 들었던 기독교 영어 유치원을 알아보았지만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넷을 아무리 쥐 잡듯 뒤져봐도 공고는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하나님 하는 데 어느 날 엄마가 역 주변에서 영어 어학원 셔틀버스를 보았다며 번호를 적어왔단다. 공고도 안 올라왔는데 전화를 해서 뭐라고 해..? 당황한 내게 엄마는 전화해서 사람 구하는지 물어보기라도 하라며 중년 아주미 특유의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연찮게 첫 직장에 입사했다. 직장은 잡아야 했지만 엄빠품은 떠날 수 없으니 파트타임으로 월 8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에도 그저 행복했다. 돈이 뭐가 중요해, 나는 차근히 스텝을 밟아 나만의 영어 유치원을 차리고 말 텐데. 미래를 내다보는 포부 넘치는 당당한 신여성의 마인드가 나를 휘어잡았다.
한동안은 여유로운 일상에 감사했다. 따뜻한 봄날에는 아이들을 푸릇한 잔디로 뒤덮인 마당에 데려가 한바탕 뛰어놀았고, 교실 안에서도 온갖 영어 게임을 하며 점수에 얽매이지 않는 진짜 영어를 자연스레 가르칠 수 있었다. 서울 진출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지만 땅을 밟고 꽃과 벌레를 쫓아 우와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윗이 들판에서 양을 치듯 나도 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이곳에서 잘 보살피겠노라 기도했다.
감사한 여유로움과 양 치듯 아이를 돌보는 열심도 잠시. 풀타임으로 전환되어 학원 오픈하는 일을 추가로 맡게 되었다. 비번을 눌러 문을 연 후 현관 주변을 빗자루로 쓸고 발판을 탈탈 흔들어 연갈색의 두텁게 쌓인 먼지를 떨어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옆으로 꺾어도 먼지가 입안에 다 들어차 있는 텁텁함에 떨떠름 한 날이 많았다.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어 서울 상경이라는 꿈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사무엘은 성전에서 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매일 성전 문을 닫고 잠그며 일상에 충실했다는 설교를 듣고 그래 아직인가 보다, 체념했다.
일하는 동안 월급은 80만 원에서 120만 원으로, 14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올랐다. 맡은 업무도 늘고 책임감도 늘었지만 현실감까지 늘어버리니 스트레스도 최고로 늘어버렸다. 멋 모르던 시절에는 완벽해 보이던 학원 운영 방침에 금이 가고 여기저기 빠지직 깨지는 날이 잦았다. 마침내 유치부 아이들을 맡았을 때는 수업을 위한 교구와 활동 자료를 모두 직접 고안하고 만들어야 했는데, 원장님께서 동네 문구점에 재료값을 대주신다고 한건 그나마 큰 도움이었다. 재정적 부담은 덜었다는 게 감사해야 할 일이라니, 대체 여긴 왜 아무런 커리큘럼이 없는 거야.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해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집과 직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던 지루해진 일상에 새로운 루틴을 당연스레 추가했는데, 동네 제일 큰 문구점에 가서 재료를 고르고 큰 봉투에 담아오는 일이었다. 수업은 매일 있었기에 문방구를 가는 날도 자연스레 늘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잠시 들러야 할 정도로. 한 두 개를 사는 게 아니었으니 물품을 스스로 못 찾을 때면 일하는 언니에게 부탁했다.
그 언니는 서비스업 하는 사람 이상으로 내게 친절했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느라 필요한 말만 점잖게 하던 나도 점차 언니의 따뜻한 온도에 경직된 어깨가 풀어졌다. 우리는 곧 동네 친구를 사귄 듯이 너스레를 떨며 호호 같이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게 서비스의 기본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당시 일에만 매달리느라 지쳐있던 차에 문구점에 들러 언니와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에 들러 목을 축이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었다. 나를 반겨주는 이가 있다는 위로가 주는 기쁨, 설렘 같은 몽글몽글한 감정을 느낀 것은.
퇴근 후 여느 날처럼 신나는 얼굴로 문구점에 들어선 나는 본능적으로 언니를 찾았고 평소처럼 밝게 인사했다. 그런데 언니는 웃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웃는 나를 받아줄 마음은 없어 보였고, 일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면 절대로 대꾸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 안.. 안녕히 계세요, 눈치 보며 우물쭈물 인사하고 나오니 내 마음이 와르륵 무너지고 말았다. 울음이 터질만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눈물이 아니면 가시지 않을 감정이었다.
내가 말실수를 한 게 있던가, 사장님이 나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그랬나, 언니가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나 대체 무슨 일로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했나.
언니를 걱정하고 궁금해하던 마음은 우리가 십 년을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이까짓 일로 섭섭해하는 나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지루한 일상이면 문구점 점원의 말 한마디에 꼬리가 떨어지도록 엉덩이를 흔들어 반가워했던가. 대체 무엇을 기대했길래 언니의 차가운 눈빛에 세상이 무너진 듯 공허해졌을까.
원하는 직업을 찾아 소명을 이루며 산다는 자부심은 넘쳐났지만 반복되는 하루에 기쁨이 사그라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지나치다 만난 사람의 존재 하나로 모든 희망이 살아난 듯 밝아진 내 모습에 나는 지독히 외로운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럴 거면 잘해주지 말지.
남자 말고도 나를 설레게 할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입 꾹 다물고 아무 말 않았으나 반쪽 나버린 기대감을 보니 아직 남아있는 반쪽이 아까웠다.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제대로 보게 할 리 없었다. 반토막 쓸려간 자리에 그만큼의 오기가 솟구쳤다.
이대로 접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