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내뱉은 진심, 날아간 약속 (1)

사랑할 거야 아니 사랑하지 마

by 아링

27살에 처음 제대로 해 본 연애가 마침내 끝이 났을 때 목사님은 내가 아주 잘 버티고 있다고 칭찬하셨다.


지나간 추억이 떠오를 때면 입에 술을 대는 게 아니라 꼭 쥔 두 손을 대고 울며 기도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어 짐을 싸 혼자 3박 4일간 부산 순천 여행을 하기도 했고, 헤어진 그 사람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친구한테 전화를 해 한참 동안 하소연을 하곤 했다. 홀로 던져진 어두컴컴한 시간을 어떻게든 버텨내던 그때야말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시작했던 것 같다.


성경을 읽고 노트에 끄적이며 사람이 내게 해 준 사랑과 예수님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을 비교했고, 사람이 내게 해줄 수 없는 사랑을 예수님은 나를 향해 기꺼이 해주셨구나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평생을 교회에서 자라며 들어온 복음이지만 여태 나의 복음은 아니었구나.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났다. 거실 창가에 비춰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게 안정적인 계절이었다. 전적으로 의존했던 전 남자 친구의 빈자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메꿔지기 시작했고, 테스트 삼아 꺼내 본 그와의 옛 사진을 볼 때면 예의상이라도 울어야 했건만, 아무리 눈을 껌뻑이고 그 시절 슬픈 생각을 해도 눈물 한 방울 흐를 줄 몰랐다. 바라만 봐도 속이 미어져 어쩔 줄 몰랐던 카카오톡에 저장된 그의 이름이 단순 세 글자로만 읽히는 날이 드디어 찾아왔다. 자유했다. 가벼웠다.


덜컹대는 차 안에서 여유를 되찾고 부드럽게 주행하던 내게 덜컥 브레이크가 걸린 건 다시 또 사랑 때문이었다.


새 신자 한 사람이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저마다 다른 깊이겠지만 아무쪼록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긴 하더라. 까무잡잡 남자다운 피부색에 진하게 그려진 훈남형 이목구비. 반듯하게 벌어진 두 어깨 사이로 잔잔히 울리는 차분한 중저음까지. 몇 개월 전 올리브색 셔츠를 입고 왔던 사람이었다. 잠깐 방문하신 건지를 간단히 물었던 그 짧은 대화에도 매너 있게 행동했던 그가 다시 오다니, 이게 웬일이야. 그가 우리 셀에 배정되기를 남몰래 바랬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전 남자 친구와 지지고 볶으며 웃고 울면서 대단한 연애랍시고 떠벌린 게 불과 3개월 전이었는데. 환승 이별을 한 것도, 양다리를 걸친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나조차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사랑에 애걸복걸했던 나는 한차례 실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사랑을 하고 싶었다.


나의 시간은 온통 그에게 가버렸다.


예배당 입구에 주보를 들고 서서 그가 언제쯤 오려나 목 빠지게 기다렸고, 예배 후 셀모임을 가질 때도 어떻게든 그와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교회에 나오지 않은 날에는 무슨 일이 있어 못 나왔는지 개인 톡으로 물어볼 수 있는 셀장의 특권을 확실하게 누리기도 했다. 환하고 밝은 셀장이 되어 천사 같은 다정함을 무기로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렇다 할 썸의 신호는 보이지 않았다. 친한 교회 동생은 누나, 이 정도면 안될 사이예요. 피식 웃으며 정신 차리라고 하더라. 그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딱 봐도 가능성이 없다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쳤구나 한껏 풀 죽은 채로 안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짝사랑은 짝사랑이고, 첫 출근 전 할 수 있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루 동안 카톡을 삭제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다짐했다. 내가 이 사람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따로 만나본 것도 아닌데. 그에게 이만큼이나 빠져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지난번 이별의 후유증으로 마음이 헛헛했던 거야. 진짜 사랑이 아니라, 때마침 나의 외로움에 비친 그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뿐이야. 다시 하나님께 집중하자. 말처럼 쉽지 않았기에 그날의 안동은 우울함으로 잠식되어버렸다. 여행길 내내 하나님을 애타게 찾았건만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내 인생에는 참 지지리도 별 일이 없지. 여행을 가서 특별한 일이 생기지도, 유쾌한 시트콤 같은 장면이 연출되지도 않았다.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냥 그런 하루. 그럼에도 밤늦게 집에 도착하고 나면 그에게 카톡 하나가 와있지는 않을까, 근거 없는 희망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한편으로는 그 카톡으로 인해 오늘이 기쁨으로 마무리된다면 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란 말이야, 오기가 일었다. 내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 이어야 하는데! 시소의 양 끝자락을 홀로 열심히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애초에 시소를 타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내 인생은 반전 드라마가 되어야 했으니까.


짐을 대충 내려놓고 카톡을 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빨간색 동그라미에 당연하게도,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두 눈으로 확인하니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틀어막고 울면서 기도했다. 지금 내 마음이 너무 허해서 힘드니까, 나를 좀 위로해달라고. 정신 차리고 하나님으로 다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이까짓 일로 이렇게 비틀대는 나를 견디기가 힘들어요 하나님.


진정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떠 어제보다는 담담해진 내 상태를 마주했다. 나쁘지 않았다. 덤덤히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요란했던 어제와 달리 고요한 오전을 맞을 수 있어 감사했다. 평정심을 되찾은 나의 마음에 그의 존재는 살포시 먼지가 내려앉은 얇은 사진 한 장으로 남으려던 참이었다.


카톡 -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에게 첫 출근길 힘내라는 카톡을 받았다.









사진출처 _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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