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 진짜 엄마인가요
태어나고부터 내리 20년을 보냈던 교회에서의 추억은 나의 어린 시절의 전부로 남아있다. 학교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학생으로 바람 들 날 없는 생활을 했지만, 교회에서는 터줏대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니 쓰고 달았던 순간들로 가득한 게 당연하다. 손 번쩍 들어 성경퀴즈의 대상을 받는 모범생이었고 예배 후에는 교회 마당과 식당을 드나들며 그 날의 놀이를 진두지휘하는 여자팀 대장이었다. 교회 옆 놀이터는 남자 무리들과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는 전쟁터였고 교회 큰 봉고차 안은 서로 웃기기 대결을 하며 꺄르륵 대기에 완벽한 아지트와도 같았다. 비 오는 날에는 다 같이 달팽이 수집을 하고 웅덩이를 찰박거렸으며 눈이 오는 날에는 비탈길을 찾아 쌀포대 위에 앉아 썰매를 타곤 했다. 교회 오빠의 오토바이에 탑승해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놀이동산에 온 것 같은 스릴 넘치는 주일도 있었고 빈집을 찾아 공포체험이랍시고 꺅꺅 소리 지르고 있는 힘껏 달려 나오기를 반복한 날도 있었다.
당시 어린 우리들만 즐거웠던 게 아니라 부모님들도 사이가 좋았어서 오후 예배 후 음식을 싸들고 자연으로 소풍 가는 일이 많았다. 은박 돗자리를 깔고 잔디밭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기타 반주에 찬양하고 해가 질 때쯤 다음 주에 뵈어요! 각자 집으로 돌아간 시절. 서로가 있어 당연해진 주일의 일상에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했다. 안정감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 돌아봐도 그때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의 가족이 사업의 실패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다른 가족 또한 떠나버렸다. 같이 어울리던 언니들도 중학생이 되자 자연스레 교회를 멀리하더니 어쩌다 시내에서 마주쳐도 인사조차 할 수 없는 어사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버틸 힘이 있었던 것은 기존 멤버 몇 명이 아직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단짝의 부재에 헛헛함도 잠시, 새로운 전도사님이 오시고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교회 언니를 중심으로 새로운 “우리”가 형성되었다. 수련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했던 끝말잇기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걸핏하면 리튬 같은 과학 원소 용어로 한 방 먹이는데 그 단어가 나올 걸 알면서도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면 딱빰을 맞아야 했는데 덩치는 작은 것들이 손가락 힘은 어찌 그리 센지 이마가 분홍빛으로 물들어 쓱쓱 문지르며 씩씩댔다.
몇 명 안 되는 규모였기에 서로를 가족처럼 돌보았는데, 당시 중학생이 된 나는 어른과의 대화도 좋아했다. 전도사님과 교사인 언니, 집사님에게 배우고 들을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내게 다정한 그분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때 나를 가장 살뜰히 챙겨주신 분이 바로 중등부 교사를 맡고 계신, 내 또래 남자아이의 엄마였다. 내 이름을 따쓰하게 불러줌은 기본이고 나를 제 친 딸 같이 예뻐해 주셨다. 가시 돋친 말과 교만한 태도로 오만방자했던 내게 집사님은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나는 집사님의 아들을 향해 너는 왜 하나님 믿는다면서 기도할 때 울지를 않느냐, 뭣도 모르고 판단의 화살을 날리던 때에도 집사님은 그저 사람마다 표현의 방식이 다를 수 있을 뿐이라고 차분히 설명해 주셨다. 집사님에게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았던 나는 점점 더 집사님을 편하게 대했고, 친근감의 표시로 반말을 섞어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집사님의 친 아들은 이런 나를 보고 기막혀했다. 자신은 엄마에게 철저한 존댓말로 깍듯이 대하는데 어디서 굴러들어 온 애가 겁도 없이 턱턱 짧은 말로 대답하는 건가, 대놓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는 왜 우리 엄마에게 반말을 하니?
그 아이의 질문은 “반말”이라는 내 태도에 딴지를 거는 듯했지만 사실 그건 다름 아닌 네 엄마가 아니고 우리 엄마야, 라는 경계심이었던 것 같다. 친하면 반말 좀 섞어 쓸 수도 있지! 되려 뻔뻔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반말은 안 되는 건가, 라는 찝찝함이 남았다. 그 친구의 질문의 핵심은 단지 반말에 있지 않았는데. 남들 다 아는 사실을 나는 잘 몰랐다. 진짜 엄마가 버젓이 있는데도 다른 아이의 엄마를 쫒아다니며 엄마 엄마, 애기 짓을 하고 다닌 내 모습은 반말을 썼다는 찝찝함에 꽁꽁 싸매어 내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집사님의 아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원체 약하게 태어나 자잘한 질병이 많았고 특히 천식으로 고생한 게 기억난다. 좀처럼 키가 크지 않는 것도 큰 걱정이셨다. 그런 아들에게 집사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시려는, 내가 바라던 전형적인 “엄마”의 삶을 사셨다. 아들이 아프면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들이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사랑 가득 담아 밥을 떠 먹여주는 아들바보 엄마. 정작 내 친구는 그런 엄마가 부담스러웠겠지만 내게는 한 없이 푸르러 보이기만 하더랬다.
우리 집 잔디는 연두색이 아닌 거무죽죽 흑빛을 겨우 띌 뿐이었다. 교회 식구들과 솥뚜껑에 구운 삼겹살 파티를 한 날이었는데, 그날도 집사님은 어김없이 아들 찾아 삼만리 셨다. 아들 어서 이것 좀 먹어보라며. 후후 불어 아들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러움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우리 엄마가 보였는데 하필 우리 엄마는 고기를 꼭꼭 씹어 야무지게도 드시고 계셨다. 원망 한 움큼 삼키고 왜 나는 안 챙겨주냐 엄마에게 물었다. 걔는 약하니까 그렇게 챙겨줄 수도 있는 거고, 너는 다 컸잖아 엄마의 심플한 대답이었고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그렇지, 했다. 흠을 찾을 수 없는 말인데도 서운함은 가시지를 않았다.
친구가 아플라치면 세상이 무너질 듯이 호들갑을 떠는 집사님을 바라보니 엄마라면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놀다가 다쳤을 때도 나는 다 큰 아이니 괜찮아야 했다. 엄마 나 여기 다쳤어 울먹이면 슬쩍 보고 괜찮다 했다. 성가신 일을 어영부영 급히 마무리하는 사람 같이, 툭툭 먼지 떨고 갈 길 가버리는 사람 같이. 어구 괜찮아? 한 마디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무던한 우리 엄마는 내 아픔에 공감해주기보다 너 진짜 괜찮다는 사실만 덤덤하게 강조했다. 엄지 손가락 위에 화상 자국이 남았을 때도 우리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그 화상 자국은 남동생의 실수로 생긴 일이었는데 너였기에 다행이지 다른 집 딸내미한테 그랬으면 얼마나 미안했을까 라고 말한 건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그 말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남의 집 딸내미에게 미안할 일이라면 당신의 딸내미에게도 그만큼 속상했을 일이라는 걸 은연중에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알면서도 왜 여전히 괜찮다고만 말하는 걸까. 결론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이제 더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아무렴 괜찮았다. 내게는 진짜 엄마같이 잘해주시는 집사님이 있었으니까.
헤어짐이 있었다는 걸 어느새 잊은 채 새롭게 찾아온 우행시 같은 시간도 야속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마음으로 깊이 의지하던 집사님이 곧 떠나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그다음은 희미하다. 많이 울었던 것만 기억한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학교로 아들을 데리러 온 집사님을 만났는데 집사님! 하며 다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헤어짐에 속이 상해 울기만 하는 나를 보시며 같이 울어주시던 집사님이 해 주신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아링에게 많은 사랑이 필요해 보였어.
뭐든 안다고 자부했던 고등학생 때 들은 말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렸다. 무슨 뜻일까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고, 당장 눈 앞에 닥친 이별에 서러울 뿐이었다. 친구들은 저분이 누구길래 그리 우냐고 물어왔지만 그저 아는 집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결국 그녀는 내 진짜 엄마가 될 수는 없었다. 나를 사랑으로 주일마다 키워주셨지만 마침내는 헤어져야 할 타인이 아니던가. 곁에서 영원히 보듬어주고 사랑으로 먹여줄 그런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가 있어도 없는 삶에서 진짜 엄마를 찾는 노력은 이렇게 마무리되는듯 했다.아무리 찾아도 집사님 같은 분은 없었고, 이미 나는 졸업을 해 대학생이 되었으니까.내 어린 시절 내내 엄마는 내가 괜찮다고 말해왔으니 나는 괜찮았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이를 찾아 나섰다.
엄마의 자리를 채워준 집사님이 떠난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