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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사탕 Nov 30. 2020

내려놓으니 보이기 시작했다.

가려져 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튼이 쳐 있을 때엔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 쳐 있어 앞이 보이지 않아도 커튼을 열어 볼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커튼은 움직이지 않는 거라고, 고정되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난 그렇게 육아를 했다.

바보처럼 


모든 걸 안고 있었다. 


그렇게 한 육아는 버겁기 시작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에게 매달리다 보니 행복한 날 보다 지친 날이 많았다. 


아이의 감정도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  조절 가능한 걸로 생각했다.

난 인형이 아니야!라고 외치고 또 외치면서도 아이를 인형으로 생각하고 아이의 친구, 아이의 생각, 아이의 행동, 아이의 말투 아이의 모든 걸 내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가 보는 세상에 나도 모르게 커튼을 쳐 놓고 아이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커튼 속에 아이는 티브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이의 친구도 이 친구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유치원 친구들 이름을 달달 외우고 유치원 같은 반 엄마들하고 친해지고 키즈카페도 같이 가고 아이가 그 친구랑 놀지 않으면 왜 안 놀아? 같이 놀아, 같이 놀면 좋을 것 같은데? 가서 같이 놀자라고 말해봐 라고 아이를 다그쳤고 아이가 아이의 생각을 말하면 아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를 묻고 들으려 하기보다는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라며 아이의 생각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점점 아이는 엄마인 나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는 모습이 길어졌다. 


고정인 줄 알았던 커튼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회사를 휴직하고 나서 육아에 모든 걸 올인했을 때였다.  휴직하고 몇 개월 동안은 커튼에 커튼을 쳤지만 커튼봉이 무너지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아이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걸 


처음엔 무엇인 정답인지 몰라 답답했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어 더욱 답답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큰 고통을 나에게 주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아이를 보고 육아서를 펼쳐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닌 나였다. 

엄마라는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 나에게 문제가 있었고

나의 문제를 알지 못한 채 아이 마음에 상처만 주고 있었다.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고

아이의 의견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만 노력했다.

아이의 친구 이름 외우지 않았고 아이의 친구가 어디에 사는지 학원은 어디 다니는지 그 아이이 엄마와 친하게 지내며 연락처를 주고받아야지 라는 생각 내 마음 깊숙이 넣어 두었다.


온전히 아이가 아이의 세상을 바라보고 살 수 있게 멀리서 아이가 슬프면 위로해주고 기쁘면 같이 기뻐해 주고 아이의 마음만 토닥여주고 안아주기만 했다. 


나의 이런 모습은 다른 엄마들에겐 무관심하다. 젊은 엄마라서 그러가 봐, 아이 엄마가 낯을 가리나 봐, 사회성이 없나 봐 라고 생각하고 수군거리는 모습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반 엄마라도 형식적인 인사만 주고받고, 같은 반 엄마인 건 알지가 억지로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이가 아이들에게 전하는 모습 

어른들이  하는 말에 아이가 받는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 아이만 생각하며 다른 집 아이를 문제아라고 인식하는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유치원 친구가 내 딸에게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 나쁜 아이래")

내 귀에 들리는 내 아이의 행동은 어른들의 헌담이었고 그 헌 담에 난 내 아이만 잡고 있었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모든 걸 내려놓았고, 내 딸만 바라보고 내 딸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가려있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려놓으니 보이기 시작했다.

난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해서 내려놓고 나의 세상, 아이의 세상을 그려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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