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 지나고, 2021년 12월 마지막 날.
부산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내려왔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럴 땐 답이 정해져 있다. 갈맷길을 걷는 것.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알차게, 꽉 채워 걷기로 했다.
이번엔 멀리서부터 걷고 싶었다. 오고 가는 동선을 따져보다가 8-1구간, 금정구에서 해운대구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금정구로 향했다.
예쁜 저수지를 지나 부엉산으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다. 하늘은 맑고, 산은 푸르렀다. 걷기 좋은 날이란 이런 날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부엉산 전망대에 오르니 마치 예능 프로그램 촬영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전망대에는 산불조심 모자를 쓴 지킴이분들이 순찰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고, 갈맷길 띠지를 따라 내려왔다.
산을 빠져나오니 대나무 숲길이 이어졌다.
판다가 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길. 햇살을 머금은 푸른 숲에서 사진을 남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운대구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플로깅을 곁들였다. 바람이 무척 불었지만, 쓰레기 줍고 걷고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오히려 더 집중이 됐다. 인근 배출 장소를 발견해 바로 처리하고 종점까지 마저 걸었다.
갈맷길 8-1구간은 시작점에서 중간 스탬프까지 거리가 꽤 된다. 솔직히 지루하고 힘들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경치를 보며 쉬엄쉬엄 걷는 게 중요하다. 나도 ‘아직인가?’ 싶을 만큼 한참을 걷다가, 저 멀리 중간 스탬프가 보였을 때는 허탈하면서도 반가웠다. 다행히 중간 스탬프에서 종점까지는 얼마 남지 않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2021년의 마지막 날, 갈맷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이 완주 미션을, 내가 친구와 함께 시작했다는 사실을. 얼떨결에 시작한 이 도전이 길 위로 나를 데려왔고, 그 길이 또 다른 길들을 만나게 했다.
길 위의 도전은 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더 멀고, 더 크고, 더 깊은 길로 나아가게 했다.
2022년 1월. 새해가 밝았다.
부산갈맷길 완주를 위해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번 목표는 영도에서 가장 먼 구간, 기장 1-1에서 1-2구간.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버스, 지하철, 다시 버스를 갈아타며 약 2시간. 임랑해수욕장, 시작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걷지 않았다. 먼저 근처 편의점에서 큰 종량제봉투를 샀다. 해수욕장 주변 쓰레기를 한가득 주웠고, 담지 못한 쓰레기는 한 곳에 모아 사진을 찍어 기장군 민원센터에 올렸다. 쓰레기를 줍는 데만 30분. 그제야 진짜 걷기가 시작됐다.
시작점에서 사진을 찍고 길을 나섰다. 갈 길은 멀었다. 문제는 분명 갈맷길 띠지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경로를 이탈했다는 점이었다. 친구와 둘이서 “우리가 어디서 잘못 간 거지?”를 반복하다 결국 결론은 하나. 되돌아가기.
한 시간 넘게 걸은 길을 다시 걸어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시작부터 삐그덕거렸지만, 아침 일찍 출발해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는 구간인지 띠지와 방향 표시가 부족한 곳도 눈에 띄었다. 헷갈렸던 지점을 사진으로 남겨 부산갈맷길 측에 공유하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걷다 보니 기장군청 앞. 도착과 시작 스탬프를 찍었다. 목적지는 해동용궁사였다. 용궁사로 향하는 길은 바다를 끼고 새로 정비된 산책로였다. 해가 저물 무렵이라 노을이 지고, 바다 위에는 윤슬이 반짝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죽성성당을 지나 용궁사를 향해 걷는 동안, 솔직히 다리는 후들거렸다. 쉬고 싶었지만 의자가 보이지 않았다. 선택지는 하나, 계속 걷기. 수산박물관 앞에서 스탬프를 찍고, 조금 더 걸어 해동용궁사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온 용궁사에서 동전을 던지고 새해 소원을 빌었다. 기도도 올렸다. 새해라 그런지 사람들은 더 많았지만,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언제 다시 영도로 돌아가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지만, 계획한 걸 모두 해냈다는 사실에 마음은 가벼웠다.
길을 걸을 때, 나는 거의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목표 하나만 또렷해진다. 끝까지 가고 싶다.
여행하듯 길을 걷는다. 다시는 안 올 것처럼 사진을 찍고, 풍경을 눈에 담는다. 그래서 혼자보다는 둘이 좋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무엇보다 안전하다. 길을 걸을 때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길 위의 여정은 계속된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나는 과연 완주증을 손에 쥐었을까.
다음 이야기도, 길 위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