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그래도 끝까지 걸었다

by 블리

속초사잇길을 완주하던 전날,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길을 걷는 내내 ‘안전’이라는 단어가 마음 한쪽에 오래 남아 있었다. 들떠서 걷기보다는 주변을 더 살피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그럼에도 길은 이어졌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속초는 설악산과 가까워서, 걷는 내내 울산바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웅장한 모습. 설악산 자락의 단풍을 벗 삼아 걷는 길은 조용하지만 단단했다. 풍경은 말이 없었고, 그 침묵이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서울둘레길을 걸을 때부터 함께했던 신발은 이미 한계에 와 있었다.
밑창이 떨어져 ‘살려달라’고 달랑거리고 있었고, 속초사잇길을 끝으로 이 신발은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걷는 내내 신경이 쓰여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마저 지금의 걸음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굳이 이 길을 걸어야 할까?


지루한 순간도 있고, 이유를 찾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억지로 의미를 붙이려 하지 않는다. 그냥 걸어야 하는 길이라서 걷고, 힘들면 잠시 멈춘다. 다시 숨을 고르고, 또 한 발 내딛는다.


그러다 우연히 처음 보는 만세운동기념관을 만났다.
대한독립을 외쳤던 사람들이 실제로 만세를 불렀던 자리.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길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해파랑길로도 이어지는 속초사잇길은, 개인의 걸음과 역사적 기억이 겹쳐지는 길이기도 했다.


바다를 마주한 구간에서는 발걸음이 자주 느려졌다.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산 바다와는 전혀 다른 결의 동해 바다. 넓고, 투명하고, 조금은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하루 할당량을 채우고 나서야 유명한 찐빵집에서 군것질을 하고, 감자옹심이로 배를 채웠다.


보통은 목표치가 먼저라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편인데, 이 날은 달랐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함께였고, 속도를 맞추며 무리하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걷기와 여행의 균형이 딱 맞아떨어진 하루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 아침,

숙소 근처에 영금정이 있어 체크아웃 전에 다녀왔다. 이른 시간이라 일출을 볼 수 있었고, 그 장면은 말없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마지막 구간을 완주하기 위해 다시 길에 섰다.


청초천길은 짧은 듯하면서도 길었다.

표식이 뚜렷하지 않아 잠시 난감했지만, 우리에겐 네이버지도가 있었다. 빠르게 걸어 마지막 구간을 마무리하고, 완주증을 받으러 향했다. 맑은 날씨 덕분에 멀리 보이는 울산바위는 유난히 웅장했다. 언젠가는 저 길도 꼭 걷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이상하게도 여행의 마지막 날은 늘 이렇게 맑다.


속초사잇길 인증 장소는 ‘속초에살다’ 건물 2층에 있었다.
스탬프북을 제출하니 예쁜 메달과 증서를 건네주셨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질문과 함께, 예쁘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아마도 젊은 사람이 이 길을 걷는 일이 드물어서였을 거라 혼자 짐작해본다.


부산 갈맷길에서 시작해,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그리고 속초사잇길까지.


끊임없이 나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보는 이 도전이 스스로 참 뿌듯하고 멋지게 느껴진다. 이제 다음 길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또다시 지도를 펼치며, 다음 걸음을 고민해본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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