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길 100km 완주 도전

by 블리

퇴사하고 나니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들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다.
걸어온 길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이야기를 쓰다 보니, 산부터 시작해 전국을 꽤 성실하게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2023년 10월 말.
제주에 ‘올레길’이라는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순간, 별다른 망설임 없이 비행기표를 끊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100km 완주, 그리고 완주증.


올레길을 걸을 때는 모바일 스탬프북과 실물 스탬프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실물이 좋아 공항에서 직접 수령했다.
손에 쥔 스탬프북 하나만으로도, 괜히 제대로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은 저녁 비행기라 걷지는 못했다.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해 동행을 구해 고등어회와 한라산 소주로 가볍게 몸을 풀고, 다음 날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이 처음이었던 나는 혹시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사전에 동행을 구해두었고,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지내는 친구 두 명과 17코스 시작점에서 만났다.


문제는 가방이었다.
6박 7일치 짐이 들어간 배낭은 상체만 했고, 메고 걷는 건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중간에 가방을 버릴까, 픽업 서비스를 요청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당일 예약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가 올레길 코스 근처라, 짐을 맡기고 다시 길로 나설 수 있었다.


동행들과 함께 걷는 길은 유난히 빨리 지나갔다.
나이도 비슷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즐거웠다.


제주에서 처음 본 귤밭은 신기했다.
‘따도 되나?’ 하는 호기심이 들었지만, 양심이 발목을 잡아 사진만 찍고 지나쳤다.
오름과 바당, 마을과 귤밭까지.
제주 올레길은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얼굴에 웃음이 떠날 틈이 없었다.


어느덧 한 코스의 종점에 도착했을 때, 동행들은 여기까지만 걷겠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처음 걷는 사람에게 하루 30km가 넘는 길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인사를 나누고 남은 한 코스는 혼자 걸었다.


첫날 나는 17~18코스, 약 39km를 걸었다.
해안길을 따라 걷고, 마을과 시내를 지나며 길은 계속 얼굴을 바꿨다.
17코스에 비해 18코스는 유난히 조용하고 한적해서 혼자 걷기엔 조금 심심했다.
그래도 혼자 걷는 길이 위험하진 않았고, 생각보다 걷기 좋았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39km를 걸어낸 내 모습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다음 날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일단 하루를 해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제주 올레길 100km, 3일 완주 도전의 2, 3일차는 온전히 나를 이겨내는 시간이었다.
둘째 날에는 약 38km, 셋째 날에는 28km를 걸었다.


첫날엔 아무렇지 않았는데, 둘째 날 아침 걷기 시작하자 발에서 신호가 왔다.
신발이 맞지 않았는지, 근육통이 심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라 대처 방법도 몰랐지만, 이미 출발한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어찌저찌 그날의 할당량은 다 채웠다.


7~8코스를 연달아 걸었던 둘째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혼자라는 사실이 아쉬웠다.
사진도 남기고, 영상도 남기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게 아쉬웠지만, 아픈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이 참 자랑스러웠다.
100km를 앞둔 마지막 날은, 말 그대로 부상 투혼이었다.


다행히 6코스와 7-1코스는 비교적 짧고 평탄한 길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며 걷다 보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가도,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미련한 건지,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0월 26일부터 28일까지, 2박 3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결국 100km에 도달했다.

온몸은 근육통으로 아팠고, 발바닥엔 물집이 잡히고 터져 제대로 딛기도 힘들었지만, ‘아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낸 나 자신이 참 대견했다.


돌이켜보면 2023년은 길과 유난히 많은 인연을 맺은 해였다.
스스로 찾아 떠난 여행이었고, 길 위에서 온전히 나를 마주한 시간들이 제주 올레길로 이어졌다.
쉬워 보일 수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그럼에도 결국 해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길 위에서 다짐했다. 이런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겠다고.


아직 올레길 전체를 완주한 건 아니었지만,
3일 동안 스스로 해낸 모습을 보며 언젠가 437km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으리라 믿게 됐다.
이 길은 걷지 않던 나에게, 생각을 정리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계기였다.


이후로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지금처럼 미치게 살아보자는 다짐.
인생은 한 번이고, 내 길은 내가 가는 거니까.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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