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올레길 완주가 ‘미완’으로 남은 뒤, 나는 2026년 세 번째 올레길 완주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방식을 바꿨다. 작년에 정방향으로 걸었던 길은 역방향으로, 역방향이었던 길은 정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계절도 다르게 선택했다. 봄에서 겨울까지, 그동안 걷지 않았던 달과 계절을 골라 다시 길을 만나보기로 했다. 같은 길이라도 방향과 계절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새해 첫 길로 고른 코스는 9코스였다.
9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는 날, 올레안내소 점심시간(12~13시)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도착했다. 클린올레 봉투를 빠르게 챙기고 스탬프를 찍은 뒤 곧바로 출발했다. 역방향일 때는 올레 표식 중 ‘주황색’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길에 올랐다.
대평포구, 9코스 도착지점에서 출발해 바당길로 접어들었다. 남부발전을 향해 걷는 길에는 커다란 야자나무와 착각거울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있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남겼다. 나누리파크에 들어서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그 뒤로 웅장하게 서 있는 산방산이 시선을 붙잡았다.
남부발전을 지나 창고천을 따라 걷다 보니 하나둘 쓰레기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저 없이 클린봉투를 꺼내 들었다. 바람은 생각보다 훨씬 거셌고, 귀가 얼얼해질 만큼 차가웠다. ‘이게 정말 길이 맞나?’ 싶은 표식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이 시작됐다.
이날은 유난히 많은 올레꾼들을 만난 날이기도 했다. 9코스를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뒤섞여 새해 인사를 나누며 같은 길을 공유했다. 혼자 걷고 있었지만, 혼자가 아닌 순간들이었다.
진모르동산 안내판을 지나면 약 천 평이 넘는 귤밭이 펼쳐진다. 그 자체로 하나의 포토존이다. 몰래 귤을 따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지만, 이미 가방에 귤이 가득했던 나는 사진만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귤밭을 지나 나무데크를 따라 내려오면 큰 다리가 나오는데, 이곳 역시 사진을 남기기 좋은 장소다. 순천만습지를 떠올리게 하는 데크길 끝에는 ‘아낌없이 주는 귤’이 자리하고 있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귤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눔을 베풀어주신 주인 어르신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인상 깊었던 건, 소소하게 먹은 값만큼을 돌멩이 아래 고이 남겨둔 올레꾼들의 마음이었다. 지폐와 동전이 남긴 온기가 길을 한층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쓰레기가 많지 않아 클린하우스를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9코스를 정방향으로 걸었다면 안덕계곡에 다다라서야 보였을 클린하우스가, 역방향에서는 유독 눈에 잘 띄었다. 내가 좋아하는 안덕계곡을 지나며 맞은편 재활용도움센터를 처음 발견한 것도 이때였다. 다음에 쓰레기가 많을 땐 이곳을 이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지나 주택 앞 클린하우스에 쓰레기를 배출했다.
울창한 숲과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내리막길이라 다리만 덜 아팠다면 조금 더 걷고 싶었지만,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 앞에서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날 좋을 때 다시 와야지.’ 그렇게 다음을 기약했다.
군산오름을 앞두고 만난 화장실 안내 표지가 유난히 반가웠다. 오르기 전, 동백나무 군락 앞에서 또 한 번 발걸음이 멈췄다. 작년에는 표식 옆에 있던 나무지팡이가 보이지 않아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어지는 오르막길에서는 쉬었다 걷고, 또 쉬었다를 반복했다. 눈이 녹아 진흙이 된 길은 생각보다 더 많은 힘을 요구했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시야가 탁 트인 군산오름 전망대에 도착해 잠시 앉았다. 정자와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숨을 고르기 좋았다. 그렇게 다시 걸어 도착한 군산오름 정상.
‘폭싹 속았수다’와 ‘웰컴투 삼달리’의 배경이 된 정상부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는 순간, 거짓말처럼 바람이 몰아쳤다. 올라올 때의 맑은 날씨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는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중간 스탬프 맞은편, 한라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아래쪽 포토존이 더 마음에 남는다.
계단길을 따라 내려와 평지를 걷다 보면 내가 사랑하는 동백나무 터널이 나온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만 알 것 같은, 늘 변함없이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진을 남겼다. 분홍 바지를 입고 찍지 못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일 정도로.
올레펜션 앞, 유자나무인지 댕유자인지 하귤인지 알 수 없는 나무 앞에서도 사진을 남겼다. 저 멀리 보이는 군산오름을 바라보며 ‘내가 저길 걸어서 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12km라는 거리는 가깝기도, 멀기도 했다. 돌멩이 길을 부지런히 내려오니 대평포구가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9코스 시작점이자 도착지인 대평포구에서 마지막 도장을 찍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결론은 분명하다. 9코스는 무조건 ‘정방향’을 추천한다.
역방향으로 걸으니 끝없는 오르막과의 싸움이었다. 올라갔다 내려왔다가 다시 오르막, 군산오름이 이렇게 높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난이도 ‘상’이라는 설명이 몸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예상 소요시간 3~4시간 중 정확히 3시간 만에 마무리했지만, 체감 난이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길을 역방향으로 걸었기에, 같은 코스를 전혀 다른 마음으로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같은 길, 다른 방향, 다른 계절. 그래서 올레길은 또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