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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주스 Jul 23. 2021

열매와 바구니

사과 이야기

열매와 바구니


“너구리는 너구리답게 끓여 먹어야 너구리 맛이 나는 거야” 그녀는 너구리를 닮았다. “ 콩나물을 넣어서도 안되고 계란을 풀어서도 안돼. 다시마에 계란이 엉켜버리면 모양새가 이상하거든.” 말을 마치고 호흡을 한번 하더니 통통한 말을 내쉰다. “어쩌다  다시마가 2장 들어 있을 때는 행운이 정말 주변 가득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도 해.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야. 더 이상 그 행운이 한동안 찾아오지 않을까 불안해. 그래서 나는 차라리 작은 불행이 있는 하루가 편해, 그래야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거든”

밖에는 예고 없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구름에 가려진 세상은 채도가 낮아졌다.

그녀는 예민한 편이다. 사람들은 오해한다. 예민한 사람은 기분에 따라 비위가 상해 변덕스러운 것이라고. 예민하다는 것은 누군가 무심히 지나칠 아주 작은 사소한 변화를 느끼고 반응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만큼 사랑이 많다는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까칠하거나 까다롭거나 감정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편하니까. 편한 것은 쉽다. 쉽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인데 그걸 추구하는 사람은 가벼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녀와 나는 언제나 그렇듯 비 오는 날은 너구리 라면과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신다. 그리고 비가 오면 자주 가는 카페로 향한다. 노란 우산을 쓴 그녀는 가벼운 몸짓으로 비를 피하며 걷는다. 조금은 엉성한 모습이지만 꿋꿋한 발걸음이다. 비가 오면 늘 먹는 노곤한 카푸치노-그녀의 애칭-와 노래를 선곡한다. -드뷔시의 달빛- 조용히 흐른다. “비가 오면 달을 볼 수 없으니까” 낮에 자고 밤에 걷는 그녀는 잠깐이라도 그게 그렇게 그리운가 보다. 짧은 헤어짐도 미련을 주는 그녀가 좋다고 새삼 생각하고서 창밖을 함께 바라본다

“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꼭 심장 뛰는 소리 같아서 좋아. 카페인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해 주잖아. 두근거리게 해주는 커피와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지금이 좋아. 텅 빈 거리는 카페인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구분하기도 전에 떨린 심장소리가 들켜 모두가 부끄러워 숨은 것 같아. 숨어도 그 마음은 울리듯 가득 차. 그런 것들이 벅차고 감동스러워. 그런 의미로 지금 거리를 걷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커피를 마시는 중일 거야, 사랑을 하거나 나누고 있는 중이던가”

그녀의 속삭이듯 재잘거림, 말하면서 상기된 두 볼은 꼭 사과 같다. 우연보다 운명을 믿는 그녀지만 나는 그것과 거리가 있었고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낭만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은 뭐든 다 좋아하는 그녀지만 난 그저 낭만보다 현실적이며 감정보다 이성을 추구하고 단정 짓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은 순수한 것은 이상적이고 그것은 꽤 숭고하다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순수하게 보고 있다.-

그녀는 사계절을 좋아한다. 예쁘다는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을 가졌다. 반면 나는 가을만 좋아한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 계절만. 그런 나를 그 계절과 닮았다며 가을이 조금 더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 계절이 싫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유는 가을은 혼자가 되고 싶어지는 계절 같다는 생각에 불안이 찾아올 것 같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지난다면 그런 가을을 다시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작은 화분을 들고 왔고 빨간색 작은 열매가 맺혀있었다. 그녀는 이름 모를 식물에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손길에 금방 자랐고 어느덧 분갈이를 해줄 때가 왔다. 그녀는 뿌듯하다는 미소로 말했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나도 꽤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 그래서 나는 내 존재가 가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식물을 바라봐. 그 마음은 곧 서로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변해. 그래서 좋아. 애틋하잖아.”

가을이 왔다. 작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며 공간 가득 채워주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차가운 공기와 공허한 정적만이 나를 감싸고 그녀가 떠난 뒤 창문에 있는 화분처럼 생기라곤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지금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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