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산업 시대에는 땅과 자원같은 물리적 자산이 곧 가치였고, 그것이 권력과 신뢰의 기준이었다.
정보화 사회를 거치며 지식과 데이터가 새로운 자산이 되었고, AI 기술은 이를 학습해 스스로 판단하며 기존 가치 체계를 흔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욕망보다 시스템의 필요가 가치를 결정하고, 알고리즘이 시장과 선택을 주도하는 현실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무엇인가를 소유해야만 힘이 생겼다. 땅이든, 공장이든, 눈에 보이는 자산이 곧 가치였고, 그것이 곧 신뢰의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데이터를 가진 회사가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알고리즘 하나가 시장을 흔든다. 기술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데, 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지금도 은행은 담보부터 묻는다. 토지나 건물 같은 물리적인 자산이 있어야만 돈을 빌릴 수 있다. 세상은 이미 바뀌었지만, 기준은 여전히 예전의 것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가치는 그렇게 두 방향으로 나뉘어 흘러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중심이 되는 시대.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오래된 기준 속에 머물러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땅과 곡식을 바라보며, 가치를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 농경사회에서는 땅과 곡식 등 물리적 자원이 곧 생존의 기반이었다. 누구나 땅을 많이 가진 자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식량 생산량이 부의 기준이 되었다. 이후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석탄·석유 같은 연료를 대량 보유한 국가와 기업이 부를 독점하게 되었다. 공장을 돌릴 에너지가 많으면 곧 경제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자원’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가치의 전부였고, 생산성 확대와 물질적 풍요가 사회 발전의 핵심 지표로 여겨졌다.
가치는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지식·정보가 핵심 자산이 되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예전에는 공장 설비와 물류망을 장악한 산업체가 성장을 주도했지만, IT와 소프트웨어 기업이 창의적 아이디어와 기술력만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이 시기에는 ‘비물질화’가 가능해졌고, 한정된 물리 자원을 소유하는 대신, 혁신적인 소프트웨어 서비스로 부를 창출하는 모델이 각광받았다. 이렇게 가치 기준이 물리 자원에서 정보·지식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은 기업이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사용자 정보를 쌓았으나, 당시엔 분석 기술과 서버 인프라가 부족해 이를 체계적으로 활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접속 통계와 클릭 흐름 정도가 전부여서, 데이터가 많아도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선도 기업들은 모든 부문(마케팅·재고 관리 등)에 디지털 기록을 남기며 고객 취향과 시장 흐름을 정밀하게 파악하려 했다. 비록 ‘빅데이터’라는 용어는 생소했지만, 대규모 로그가 미래 경쟁력임을 일찍이 간파했다. 페이지 체류 시간·연관 검색어·상품 클릭 경로까지 추적한 이 디지털 흔적은, 훗날 AI 학습을 위한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그리고 비물질 자원의 가치가 극적으로 상승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인공지능, 특히 딥러닝과 머신러닝의 등장은 기존 가치 체계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이전에는 사람이 논리를 설계하고 컴퓨터가 그 논리대로만 움직였지만, 딥러닝 알고리즘은 방대한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해 규칙과 패턴을 찾는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동력은 인터넷·모바일 보급으로 폭증한 디지털 기록이다. SNS 게시글, 각종 앱의 사용 로그, IoT 기기가 전송하는 실시간 데이터가 전부 AI의 학습 재료가 되는 셈이다.
과거엔 전문가나 복잡한 매뉴얼이 필요하던 영역을, 이제는 알고리즘이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이 확산됐다. 예컨대 의료 분야에서 영상 판독을 정확히 해내거나, 금융권에서 초단타 매매로 시장 변화를 읽어내는 식이다. 이처럼 AI가 가져온 혁신은 ‘물건을 많이 만드는’ 생산성 경쟁을 넘어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결정적 힘이 되는 방향으로 가치를 재편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 데이터를 더 많이 축적할수록 성능을 높이고, 이는 다시 이용자를 유인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결국 정보화 사회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킨 AI 기술은, 과거 물리 자원에 기반했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더 이상 “무엇을 얼마나 쌓아두었느냐”로는 시장을 지배하기 어려워졌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새로운 부와 경쟁력을 창출하는 시대가 열렸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초창기에 검색 엔진과 온라인 포털은 단순 인기 순으로 콘텐츠를 정렬했다. 그러다 알고리즘이 발전하면서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개인화 추천’ 체계가 확립됐다. 쇼핑몰은 구매 이력과 장바구니를 토대로 “이 상품도 좋아할 것”이라 권유하고, 음악·동영상 플랫폼은 취향에 맞춰 자동 재생 목록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일일이 골라주지 않아도 충분히 정교한 선택지가 제시되니, 사용자는 고민을 덜어낼 수 있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뒤집어 보면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인간 대신 기계가 선별하는 상황에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뉴스 배열부터 상품 진열, 더 나아가 채용 절차에서조차 알고리즘이 평가와 판단 과정에 깊숙이 들어온 지금, 사람들은 과연 어디까지 의사결정을 AI에게 위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편안한 길’을 무심코 따르다 보면, 가치 기준의 최종 결정권을 사실상 머신에게 넘겨주게 되기 때문이다. 점차 ‘인간 → AI’라는 흐름이 가속화될수록, 전통적으로 당연시됐던 “가치는 사람이 매긴다”는 인식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구글과 아마존이 이끈 ‘데이터 자본주의(Srnicek 2016)’는 현대 자산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구글은 전 세계 웹페이지를 크롤링하고, 사용자가 입력하는 검색어와 클릭 스트림으로 사람들의 욕구를 분석해 정확한 검색 결과와 맞춤 광고를 제시했다. 그 결과, 구글은 사용자들이 무엇을 찾고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이를 기반으로 막대한 광고 수익을 올렸다. 실제로 검색어 하나하나가 전 세계의 욕구 지도를 시각화하는 셈이었다.
한편 아마존은 ‘인터넷 서점’으로 출발했지만, 고객별 구매 내역·장바구니·별점·리뷰 정보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개인화 추천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더 쉽게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도록 하고, 동시에 AWS(아마존 웹 서비스)를 통해 자사의 인프라를 다른 기업에 제공함으로써 플랫폼 파워를 극대화했다. 물건 생산 자체보다도, 얼마나 많은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고 가공해 서비스를 최적화하느냐가 핵심 경쟁력이 된 것이다. 구글과 아마존은 데이터가 쌓일수록 효율과 편의가 증가하고, 이는 다시 사용자를 모으는 선순환 구조를 완성했다. 이처럼 사용자 행동을 축적·분석하는 능력이 “유한한 자원을 수확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물리 자원 중심의 전통 가치관이 무너지고, “얼마나 광범위한 데이터를 활용하느냐”가 부의 원천으로 자리 잡는 흐름이 본격화됐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통한 효율이 높아질수록, 윤리적 갈등도 증폭된다. 대규모 데이터를 확보하려면 개인의 사소한 정보까지 수집해야 하는데, 이를 모두 자발적 동의에만 의존하기 어렵다. 사용자 대다수는 서비스를 쓰는 대가로 정보를 넘기지만, 그 과정이 과연 충분히 투명하고 공정한가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편의와 사생활 보호 사이의 줄다리기는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됐다. 거기에 더해 효율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이나 공공선이 우선인가라는 근본적 질문도 떠오른다. 결국 데이터 시대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효율과 윤리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를 계속 묻고, 이에 대해 사회마다 다른 방식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농경·산업 시대에선 땅이나 석유 같은 물리적 자원이 가치를 결정했다. 정보화 사회로 넘어오면서는 데이터와 지식이 부를 창출하는 자산으로 떠올랐다.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AI가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학습·활용하느냐”에 따라 시장이 움직이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사용자의 취향이나 감정보다는 시스템이 무엇을 우선 노출하고 추천하느냐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에 의해 상위에 노출된 브랜드나 상품은 엄청난 기회를 얻지만,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시스템의 선정 범위에서 벗어나면 쉽게 관심을 못 받는다.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자산이 진짜 살아남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게 된 것이다.
특정 분야의 클라우드나 알고리즘, 반도체 인프라가 바로 그러한 예다. 인간이 좋아서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으니 반복 호출해준다. 반면 감정에 기반한 자산들은 작은 윤리 논란이나 시장 이슈에 휘말려 폭락할 위험이 크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보다 “시스템이 무엇을 필수로 인식하느냐”가 가치의 지속성을 좌우한다. 이는 전통적 수요·공급 논리를 뒤집는 흐름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욕망이 시장을 이끌던 관성에서 벗어나, AI 알고리즘의 우선순위가 시장 주도권을 쥐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장에서 AI가 어떻게 이 흐름을 견인하고, 그 결과로 인간의 관점과 결정이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는지를 하나씩 짚어보겠다.
※ 참고문헌(이 글의 개념과 논의는 아래 책들을 발췌 또는 요약을 통해 참고하여 재해석해 구성했습니다.)
Nick Srnicek (2016). *Platform Capitalism*. Polity.
Shoshana Zuboff (2019).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PublicAffairs.
Eli Pariser (2011). *The Filter Bubble : What the Internet Is Hiding from You*. Penguin.
한병철 (2012). 『투명사회』. 문학과지성사.